(ft.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어둡고 컴컴한, 진한 먹물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터널. 터널 끝에 자리한 미약한 빛, 그 한 방울에 의지한 채 축축하고 진득한 벽면을 더듬어 통과하고 있다. 체감하기로는 터널의 중후반부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터널을 완전히 통과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고 나면 공통적으로 듣는 피드백이 아래와 같다.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꿋꿋하게,
의연하게 생활한다니.
역시 Queen 나봄답다."
이 피드백에서 한 가지 의문을 추출할 수 있다.
과연 'Queen 나봄답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Queen 나봄을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이기에 'Queen 나봄답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나를 '자신의 열정에 불을 지펴준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나를 '슬픈 상황에서 다정하고 예쁜 표현으로 따뜻한 위로를 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누군가는 나를 '힘든 상황을 의연하게 견딜 줄 아는, 강인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분명 무수한 요소들이 합산되어 'Queen 나봄'이라는 존재가 정의가 됐을 것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사회에 당당하게 뿌리 내리며 살기 위해서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의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타협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런 것들이 '나답게 만드는 요소들'이라고 정의한다.
마치 와인을 만드는 포도의 생산지 환경을 통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맛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부르고뉴의 주요 품종인 피노 누아는 다른 포도 품종과 차별화 되는, 특유의 섬세한 맛-붉은 과일 풍미, 높은 산도, 낮은 탄닌-을 구현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과거와는 다소 맛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아빠께 참 감사한 점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책부터 찾아봐라'라는 가르침을 주셨다는 점이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항상 도서관이나 서점을 찾았다.
나는 온 감각을 활짝 열고 한참 동안 서점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아빠는 참을성 있게 내 옆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봐주셨다. 내가 몇 권의 책을 골라쥐고 물끄러미 아빠를 올려다 봤을 때 아빠는 원한다면 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나는 아빠가 내게 '책'을 선물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명한 왕은 여왕이 될 공주에게 무엇을 물려줄까?(ft. 겨울왕국) 中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께서는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지식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빠르게 찾을 수 있다는 소리는 누군가가 이미 1차 가공을 했다는 소리다.
1) 그 과정에서 지식의 오리지널리티가 얼마나 유지되겠는가?
2) 사람에 따라 분명 각색이 될 텐데 그 질이 얼마나 우수할 것인가?
3) 그렇다면 이 지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4) 이 지식에 대한 너의 생각과 느낌은 어떠한가?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 것인가?
아빠는 책을 직접 찾아보고, 본인 스스로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찾은 지식을 나만의 체계로 정리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었고,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번에 WSA 와인 아카데미에서 WSET(국제와인자격증)를 공부하면서도 동일했다. WSA 와인 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WSET 수업은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와인 전문가가 직접 진행하기에, 분명 우수한 수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와인에 대한 체계가 초보자가 접근했을 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선뜻 'Yes'라는 답이 나오진 않는다(이 부분은 추후 WSA 와인 아카데미 수업 후기와 WSET 공부 방법에 대해 쓸 때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짧은 시간 내에 방대한 분량을 수업해야 하다보니 선생님 입장에서도 교재 내용을 다 전달하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보강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역시 '책'이다.
예를 들어 이번에 나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와인 AOC 체계에 대한 WSA 와인 아카데미의 수업 내용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와인은 어렵지 않아」, 「한 손에 잡히는 와인」, 「한국인을 위한 슬기로운 와인 생활」, 「와인 : 방법은 모르지만 돈을 많이 벌 예정」 등을 돌려보며 나 스스로 프랑스 부르고뉴의 와인 AOC 체계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또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들에게 공유했다.
내가 브런치, 블로그에 와인과 국제와인자격증(WSET)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내 머리 속에 체계화한 와인 지식 구조와 생각들, 느낌들을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정리해두기 위함이다.
이런 방식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엄청 비효율적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방식을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고수하는 이유는 '대체불가능한, 진짜 내것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We need to cultivate sources in the human world over dinner and a drink : Chatbots can't get people drunk and wheedle out indiscretions.
(인간들과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관계를 잘 길러내며 그들을 소스로 해야 한다. 챗봇은 사람들을 술 취하게 만들고 하면 안 되는 마음 속 이야기를 하게 할 수 없다.)
We need to relish the imperfections of the human species such as its talent for humor(which is surely tinged with sadism) and its powers of creativity
(우리는 인류의 불완전성을 아껴야 한다. 유머는 약간의 사디즘이 섞여있고, 창의성은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The great source of solace in a world tin which computers are getting cleverer all the time is that the only thing which can save us from redundancy - our imperfection- is here to stay
(컴퓨터가 갈수록 똑똑해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잉여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우리의 불완전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The Washington Post(Mar 21, 2023) 中
<조승연의 탐구생활>의 조승연 작가는 Chat GPT-4가 등장하며 전문적 지식을 기반으로 경쟁력을 갖추던 전문직이 사라질 직업 1순위에 오른 지금,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데이터 세계에 없는 아날로그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동차가 발명되었다고 달리기의 가치가 떨어지진 않았다!(조승연 작가)"
테슬라가 자율주행 자동차를 개발한다고 이야기를 해도 여전히 러닝 산업은 건재하다. 우리는 우사인 볼트가 만들어내는 신기록에 열광하며, 매일 러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라고 칭찬한다.
아무리 포도 농사가 기계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진짜 고가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1%의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프리미엄급 이상의 귀부 와인은 포도를 생산할 때 농부가 직접 포도알의 상태를 직접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수확한다고 한다. 포도 수확 기계가 고도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와인 생산에서 아날로그 방식은 와인의 품격을 높이는 핵심 가치들 중 하나다.
기계가 훌륭해지면 훌륭해질수록 문제의 99%는 기계가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1%의 차이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상급 와인 한 병을 빚는 마음으로, 나는 책을 통해 '나를 나답게 하는 요소'를 지키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생각을 공유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2번째 요소는 '소중한 사람들의 <뮤즈>가 되어준다'는 점이다. 주변 지인들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앞으로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생긴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로 인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인물들이 최근에 2명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사례를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긍정볶이(블로그 닉네임)는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만난 친구이다. 내가 이 친구를 '대단하다'라고 평가하는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본인의 부동산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다른 친구들의 자산 증식을 돕는다는 것이다.
본인이 부동산 지식이 풍부한 것과 친구들에게 그 지식을 설명하며 부동산 계약 체결에 도움을 주는 것은 엄연히 수준 차이가 있다고 본다. 나는 재태크가 나날이 중요해지는 시점에서 긍정볶이의 지식과 경험담이 누군가에겐 굉장히 가치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참에 너만의
강의를 런칭해보는게 어때?
그냥 부동산 강의를 하는 건
차별화하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셀프로 집 수리하는 방법을 같이
연결지어서 설명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너는 체계적으로 지식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할 줄 아니까 분명 강의를
해도 잘 할 거야."
나는 그녀에게 하다못해 그녀의 동종직군을 대상으로라도 강의를 해볼 것을 강력하게 제안했다. 마침 내가 강의로 돈을 버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던 긍정볶이는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긍정볶이는 올 여름에 자신만의 부동산 강의를 런칭해보겠다는 포부를 내게 밝혔다. 강의를 위해 8주 동안 8시간 내내 셀프 집 수리 강의까지 수강한다는 그녀의 열정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ㅎㅎㅎ 고마워! 나봄이 덕분이야."
나의 제안으로 인해 삶에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긍정볶이의 모습은 '나 또한 열심히 살아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 친구(지금부터 A양이라고 부르겠다)의 경우, 글쓰기, 그 중에서도 동시와 동화 쓰기에 재능이 있는 친구다. 문예쪽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을 만큼 그녀의 글쓰기 열정은 진심이다.
나는 A양에게 미국 생활을 토대로 글을 꼭 써보라고, 그래서 블로그든, 브런치든 런칭해보라고 2년 내내 설득했다. 결혼 생활도 중요하지만 이대로 그녀의 재능이 사장되는 것이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자율성과 성취욕이 높은 친구이라 더 설득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A양은 미국에서 예쁜 아들을 출산했다.
육아는 현실이라고 했던가. A양과 통화할 때마다 나는 A양에게서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A양은 'A양이라는 정체성'과 '아기 엄마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강해지는 것에서 느껴지는 우울감 때문이었다.
그런 A양이 며칠 전에 놀라운 소식을 전해줬다.
본인이 틈틈히 쓰고 있던 동시와 동화를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A양이 보내준 동시 링크를 나의 소울메이트, 엄마에게 곧장 보냈을 만큼 나는 깜짝 놀라며 감동했다.
자신이 쓴 시와 글을 책으로 출간해보고 싶다는 A양에게 나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출판 생태계를 설명해줬다. 같이 브런치 작가 신청 방법에 대해 토의하고, 지금 올리는 유튜브 영상을 숏츠로도 올려보자고 제안했다.
A양은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통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 느낌이 뭔지 알기 때문에 나는 통화를 하는 내내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누군가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나는 뿌듯하다.
먼 친척이 땅을 사는 것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땅을 사면 배가 더 아프다고 했던가. '나는 왜 저러지 못했을까?'하는 열등감, '쟤는 나랑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왜 저렇게 잘나가냐?'하는 질투심.
내가 열등감과 질투심을 마냥 나쁘게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인 이상 이 2가지 감정은 어떻게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니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여러 방법들 중 <내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네 친구가 너보다 잘 나는게 좋단 소리냐?'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진심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가까이 지내는 5명의 평균값으로 정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주변에 모지리를 곁에 두는 것보단 나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멋진 사람들을 곁에 채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당장 내 곁을 금수저, 능력자들로만 채울 수 있다면 인간 관계 측면에서 최상의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당장 내가 그런 수준이 아닌데 어떻게 상대에게 과도한 요구를 할 수 있을까?
단 한 가지.
오로지 단 한 가지라도 내가 배울 점이 있거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이미 그 사람은 그 자체로 내게 귀중한 존재다. 꼭 여러 가지 조건을 다 갖춰야만 대단한 건 아니지 않은가?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의 성장과 행복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상대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그 사람이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부여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예술의 여신 뮤즈가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가, 철학가들에게 애정과 헌신을 보내듯 말이다.
그랑 크뤼(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최상급 포도밭)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와인 양조자의 마음으로 상대가 가진 포도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돌봐준다. 포도알들이 가진 거대한 잠재력을 훌륭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면 분명 최상급 와인이 탄생할 거라 믿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러다가 버림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사람들 중에는 힘든 시기를 같이 해줬던 조강지처 같은 존재를 버리는 이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버림 받았다'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표현 자체를 사실 경멸하는 편이다. 인연을 이어나갈지, 끊어낼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이다.
나의 노력으로 상대와 인연을 쭉 이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놓아주는 것 또한 방법이다. 나를 떠난 사람으로 인해 잠시 동안 힘들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과 인연을 맺으며 나 역시 그 사람을 통해 성장했기에, 나름의 배움을 얻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헤어짐을 긍정적으로 승화하면, 헤어진 상대의 앞날을 응원해줄 수 있다. 생각해보라. 한때 나와 인연을 맺었던 대상이 파산을 했다던가, 연인이나 남편과 헤어졌다거나, 일이 어그러졌다고 한다면 마냥 기분 좋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과
내가 인연을 맺었단 말이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구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내 수준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훨씬 내 가치가 높아진다.
"아, 작가/변호사/
사업가/의사가 된 그 사람이요?
예전에 잠깐 알고
지냈던 적이 있어요.
인연이 여기까지라
더 만나지 않지만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가 참 그립네요."
실패한 사람들과 잠시라도 인연을 맺었던 사람.
뛰어난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잠시라도 인연을 맺었던 사람.
전자보단 후자가 낫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뮤즈'가 되어주는 것을 참 좋아하고, 그 자체로 'Queen 나봄'답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여왕에게 '가장 훌륭한 와인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한다면, 여왕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의 경험을 포도밭을 일구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포도밭에서 자란 포도알들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멋진 와인이
되도록 세심하게 돌봐주는 것.
수확한 포도알들이 와인이
되었을 때, 그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숙성시키는 것.
숙성된 와인을 소중한 사람들과
공유하며 와인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