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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가 만난 사람들 1

나의 소중한 막내 작가

by 정작가 Aug 22. 2023

"수민아, 이것 좀 복사해 주라”, “수민아, 여기 전화해 봤니?”

브런치 글 이미지 1

“수민아, 출연자에게 확인 전화 좀..”, “수민아, 출연자 오셨단다.”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이름, 그 혹은 그녀는 ‘막내작가’다.

제작 인원만 25명이나 되는 우리 팀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 그 혹은 그녀는 ‘막내작가’다.

그만큼 가장 많은 일을 하고, 가장 많이 고생한다.


우리 팀 막내 작가가 하는 일만 보자면,

전날 방송 시청률 올리기, 아이템 발제, 취재, 출연자 섭외 및 관리, 간단한 코너 대본 작성, 출연자 의전... 한마디로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된 소소한 일은 다 막내 몫이다. 그나마 지금 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고정이고, 취재는 피디들이 하고 있으니 비슷한 다른 프로그램에 비하면 좀 낫다고 생각한다. (막내들의 생각을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분명 선배들보다 할 일이 많다. 몇 가지 정리해 보자면,


1. 막내 작가는 왜 이렇게 많은 일을 할까?

작가들은 보통 막내로 이렇게 소소한 일을 하다가, 1년 반이나 2년 정도 지나면 기본적으로 원고를 쓰는 코너 작가로 ‘입봉’한다. ‘입봉’은 방송국에서 쓰이는 은어로 일종의 데뷔와 같은 의미다. 그런데 굳이 저런 일을 막내에게 시켜야 되나라고 묻는다면, 변명은 아니지만 이유는 있다. 아이템 발제는 기본적으로 아이템을 키우는 눈을 갖게 해 주고, 출연자 관리는 섭외하는 방법을 배우고, 출연자와의 인맥은 나중에 작가들의 인적 재산이 된다. 취재는 내 생각에 제일 중요한 과정이다. 교양이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이 틀리면 사건이나 인물이 왜곡될 수 있다. 게다가 취재를 하면서 이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어떤 포인트를 잡고 구성할 수 있는지 배워 나간다. 그건 막내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걸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때가 막내 시절이다.


2. 막내 작가는 프로그램마다, 방송사마다 일이 다를까?

이게 제작사마다, 프로그램마다 막내 작가의 역할이 좀 다르다. 오래전 한 외주 제작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사무실에 출근했는데 막내 작가가 대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다. 깜짝 놀랄 일이었다. 작가가 바닥 청소라니...

“네가 왜 그걸 하고 있어?” “처음 여기 올 때부터 이런 일도 해야 하는 거라고 했는데요.” 심지어 그 작가는 대표의 개인 심부름까지 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대표에게 괜히 말했다가 막내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 입을 다문 건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다. 나중에 그곳을 그만둔 뒤 막내 작가가 마음에 걸려 다른 일자리를 소개해주었지만, 그 작가는 자신이 처음부터 일한 곳이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지금, 그 작가는 어디에서 일하고 있을까?

열악한 제작사들이나 방송사에서 막내에게 이런 일까지 넘어온 경우를 종종 봤다. 내게 주어진 일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면, 그럴 때 선배 작가들에게 상의를 꼭 해야 한다. 좋게 좋게 넘어가면 진짜 호구 작가가 될 수 있다. 침묵을 지키면 그게 관례가 돼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막내 작가의 몫이 되어버린다.


3. 막내 작가 나이 대가 따로 있을까?

별별 일을 다하다 보니 선배들 입장에선 막 방송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경력이 짧은 작가들을 막내로 찾게 된다. 나보다 나이 많은 막내 작가에게 이 것 저 것 시키려면 입이 잘 안 떨어지고 “에잇, 그냥 내가 해야지” 하다가, 그게 서운한 마음으로 이어지면 둘 다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나이 많은 작가가 못할 것도 아니다. 팀 규모가 좀 작거나, 아니면 선배-막내로 이뤄진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다. 이럴 경우, 오히려 더 밀착해서 일을 많이 배울 수 있다.   

혹 막내 작가는 여자이어야만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절대 아니다. 작가들의 비율로 보면 여성이 압도적이지만, 남자 작가들도 꽤 많다. 나랑 일한 막내 후배들 중에 남자 작가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성실하고 잘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의젓하게 선배 작가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고 예쁘다.

몇 년 전, 남자 작가가 막내 작가 자리에 지원했다. 자기소개서를 보니 방송 경험은 적었지만, 글도 꽤 많이 쓰고 성실해 보였다. 당장 면접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 그 작가는 휠체어를 타고 왔다. 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다고, 휠체어가 익숙해져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정말 고민이 됐다. ‘우리 사무실이 12층이고, 1층 가서 지하 스튜디오로 가는 엘리베이터 타고 가야 하는데 너무 번거롭지 않을까?’, ‘만약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뛰어서라도 가야 하는데 그 작가는 그게 안 되겠지?’, ‘ 외부에 취재라고 나가게 되면 또 어쩌나?’... 결국 나는 포기했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같이 일을 하게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우리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꼭 맞는 프로그램이 나타날 겁니다. 계속 좋은 글 쓰길 빕니다.” 참, 상투적인 문자였다. 그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때 고민은 아직도 남아있다.


4. 이런 막내 작가, 좋아요!

나이가 적지 않다 보니 이제 막내 작가와 내 나이 차도 길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언니 정도 되더니, 어느새 나이 차 많이 나는 선배, 그러다 이모... 결국에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막내들과 일하게 되었다. 그 혹은 그녀의 입장에선 내가 얼마나 어려울까? 그러나 나의 입장에선 막내들이 안쓰럽고 귀여워지고 있다. 실수를 하게 되어도, 예전엔 혹독하게 혼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정하게 다독이려 한다.

그래도 메인 작가의 입장에서 원하는 막내 작가가 있다. 막 웃고, 떠들지 않아도 명랑한 작가 좋다.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고 용감한 작가 좋다. 잘못하거나 실수가 생기면 인정하는 작가 좋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선배들에게 문자 한 통 정도는 보내는 작가 좋다.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작가 좋다. (이건 내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다.)

그러고 보니 막내 작가만이 아니라, 선배 작가들에게도 해당되는 거네. 어차피 이런 막내가 무럭무럭 자라서 선배가 되는 것이니...   


막내 작가는 오늘도 바쁘다. 그래도 그 혹은 그녀가 있기에 모두가 움직인다.

우리 팀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막내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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