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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가 만난 사람들 2

나의 단짝, 진행자

by 정작가 Aug 24. 2023

많은 진행자들과 일했다. 김홍신, 송도순 선생님부터 시작해서 지금 양원보 기자까지 아나운서, 전문 진행자, 기자, 배우, 가수 등등 많은 진행자들과 호흡을 맞췄다. 방송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고, 방송은 기막히게 잘하지만 다른 건 봐줄 수가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더 최악인 건 둘 다 별로라는 것... 당연히 그런 진행자도 있었다.  


1.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오래전 아침에 하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을 했다.  3사 중 시청률도 제일 높았고, 남녀 진행자 둘 다 합도 잘 맞았다. 아니, 잘 맞는 듯 보였다. 사실은 둘의 사이는 엄청 나빴다. 생방송 진행할 때는 마주 보고 웃기도 하고, 애드리브를 주고받으며 환상의 호흡을 이어갔다. 그러나 현실에서 둘은 웬수보다 더 한  사이였다. 방송이 끝나면 서로 얼굴조차 쳐다보지도 않고, 틈만 나면 작가들에게 상대방에 대한 온갖 욕과 험담을 했다. 이럴 때 제일 곤란한 사람은 작가다. 양쪽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주고 ”어휴, 정말 힘들겠어요. “ 하며 맞장구를 쳐줬다. 특히 아침밥을 먹자고 하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다. 둘이 같이 밥을 안 먹고 따로따로 먹으니 곤란하다. 누구랑 먹으면 다른 누가 서운할 테고, 그렇다고 같이 먹자고 하면 죽어라 싫다 할 테니 차라리 나 혼자 먹는 게 낫다. 둘의 사이는 점점 더 최악이 되었는데 프로그램은 잘 나갔다.

 

일반인 출연자들이 여럿 나와서 토크를 하는 프로그램을 했다. 여자 진행자는 많이 알려진 유명인이었다.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하더니 방송은 엉망이었다. 토크의 맥을 끊어 먹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남자 진행자보다 엄청 높은 출연료를 받았다. 그의 인지도는 거의 0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그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전화로, 문자로… 나도 지쳤지만, 혹시 그의 기분이 상할까 이제 그만하자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여성 진행자는 출연료에 비해 잘 못하면서 중도 하차를 했다. 그날 이후부터 남자 진행자의 표정은 엄청나게 밝아졌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2. 공부 좀 합시다, 제발

나는 작가의 원고를 ‘말아먹는’ 진행자를 싫어한다. 어떤 방송을 하던 대충 쓰는 원고는 없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힘들게 내놓은 원고를 맛도, 맥도 살리지 못한 채 주저앉게 만드는 진행자. 발음도 엉망이고 질문의 포인트도 못 잡는 진행자.

 

그녀는 아나운서였다. 그것도 지상파 아나운서. 그러니 기본은 할 것이라 생각했다. 녹화 예정일 며칠 전부터 내게 전화를 걸어온다. 대부분 분장과 의상에 관한 것이었다. 막상 방송 내용에 대해선 묻질 않는다. 녹화 첫날이 됐다. 의상이 맘에 안 든다고 계속 투덜대는 그녀를 겨우 달래서 대본 설명을 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녹화에서 연신 실수를 한다. 부조에서 진행하던 피디가 나를 보며 한마디 한다. “작가님, 오늘 방송 내용 얘기 안 해줬어요?” 녹화가 겨우겨우 끝난다. “피디니임~ 편집 잘 부탁 드려요오~” 코맹맹이 소리로 이런 인사를 하며 녹화장을 빠져나가는 그녀. 그 후로도 그녀가 제대로 공부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아침 회의가 끝나면 오늘 할 아이템과 관련한 기사들을 인쇄한다. 중요한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치고, 별표 표시도 큼지막하게 한 뒤 그의 자리에 갖다 준다. 방송 직전, 진행자석에 앉은 그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오늘, 이 부분은 절대 언급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 부분은 순화해서 말씀해 주세요.” 방송이 시작됐다. 기막히게 내가 주의를 준 부분만 주의 없이 얘기한다. 깜짝 놀라 프롬프터에 허둥대며 ‘언급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썼지만, 방송은 이미 나갔다. “왜 그러셨어요?” “아, 내가 깜박 잊어버렸어요.” 그 후로도 그의 기억력 상실은 계속 됐다


3. 열정, 열정, 열정

공부를 많이 하는 진행자들이 있다. 방송 전부터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고, 아이템 하나를 정해도 까다롭게 굴고, 방송 진행이 잘 안 되면 왜 그랬는지 따져본다. 이렇게 넘치는 진행자들과 일하려면 작가도 힘들다. 그래도 나는 좋다. 그 혹은 그녀의 열심은 나의 열심히 되기도 한다. 때론 과하고 넘치지만, 그것을 받아서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게 작가의 할 일이다.


작가가 막 됐을 때는 진행자를 상대하는 게 어려워서 무조건 네네 했다. 진행자의 말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도 네네 했다. 진행자의 심기가 불편하다 싶으면 나까지 불편하고 불안해져 노심초사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도 유들유들해졌다. 진행자의 감정에 별로 좌우되지 않는, 적당히 공감해 주고, 다독여주는 작가가 됐다. 나이 든 작가의 장점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진행자의 마음을 읽고, 진행자에 입에 착 붙는 원고를 쓰고, 진행자를 편하게 해 주고, 진행자가 의지할 수 있는 작가. 그런 작가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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