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 강매, 사인단, 집시 등.
여행객을 대상으로 파리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유형의 사기행각이다. 파리행을 앞두고 각종 에피소드를 접하며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경험한 파리에선 비싼 가방을 메고,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들고 다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더러운 길바닥을 제집인 양 하늘을 이불 삼아 강아지와 동고동락하는 거지, 생계를 위해 에펠탑 미니어처 같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호객꾼은 많다. 다만 그들은 그저 도시의 구성원으로서 본연의 일상을 살아갈 뿐, 어떠한 위협이나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도시가 가진 수많은 악명과는 달리 내게 파리는 여자 혼자 다녀도 괜찮은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파리의 마지막 날, 이전에 미리 봐둔 물건을 사기 위해 남은 현금을 몽땅 챙겨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해 교통티켓 까르네 Carnet를 꺼내는 중 멀지 않은 곳에서 열차 소리가 들려온다. ‘저건 타야 해!’ 기다리기 싫었던 나는 머릿속 외침에 맞춰 투입구에 승차권을 넣고 종종걸음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앞만 보며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나의 어깨, 더 정확히 말하면 어깨에 멘 가방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전해져 왔다.
갑자기 더해진 무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방 위에 퉁퉁한 손 하나가 얹어져 있었다. 바로 12~14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반쯤 열린 내 가방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지하철 티켓을 꺼내고 지퍼를 덜 닫았나? 이 착한 아이가 잠가주려고 했나 보다.’였다. (돌이켜 보면 당시만 해도 나는 세상의 풍파를 알지 못했고, 참 순수한 생각을 했다.)
몇 초의 정적 후, 드디어 사태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여자아이에서 불량소녀로 돌변한 그 아이와 서로 팽팽히 대치하듯 눈싸움을 했고, 나는 때마침 들어온 지하철에 올랐다.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밖으론 또래 일행 서너 명과 함께 바로 옆 칸에 오르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들은 또 어디서 나타난 거니.’
먹이를 놓쳐 아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소녀의 앞니 하나가 빠져 있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얼굴과 대조되던 거친 눈빛과 빠진 앞니,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다.
홀로 파리시내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사인단이나 호객꾼조차 내겐 접근하지 않았다. 당연히 강매도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여행 막바지에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나 보다. 단체로 행동하는 집시 소매치기 아이들을 조심하라는 얘길 많이 듣긴 했었는데, 마지막 날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마침 들어오는 지하철 소리에 뛰지 않았다면 가진 현금을 몽땅 털리고, 빈손으로 파리를 떠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시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지하철마저 나를 도와주다니!
© 2024. by JI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