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준비성이 철저한 타입은 아니다. 거추장스레 이것저것 많이 들고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져 제대로 된 가방보단 작은 파우치나 에코백을 선호하게 되었고, 웬만한 거리는 주머니에 카드 한 장 넣고 다니게 되었다. 고로 나는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비를 대비하는 대신 젖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결정엔 일기예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도 한몫하기는 한다.
당연히 나의 여행용 캐리어에 우산을 위한 자리는 없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내게는 3단 우산이 없을뿐더러 회사에서 받은 아주 큰 장우산 내지 급하게 편의점에서 사 모았던 투명한 비닐우산만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여행 중 비가 내려도, 우산이 없어도 할 건 많다. 밖에 안 나가고 숙소에서 쉬던가, 그냥 맞으며 걷던가, 아님 눈에 보이는 아무 데나 뛰어 들어가면 그만이다. 나는 건강하고 비를 맞아도 끄떡없으니깐.
도쿄에서 내가 놀란 것 중 하나는 곳곳에 우산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호텔에선 아무 조건 없이 무료로 우산을 대여해 준다. 아예 객실 안에 우산이 따로 준비되어 있기도 하다. (반면, 한국에선 디파짓을 지불하거나 신분증을 맡겨야 한다.) 음식점에도 카페에도 공공시설에도 우산이 있다. 직원들은 주저함 없이 당연하다는 듯 우산을 내어준다.
건물에서 건물을 잠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면 비를 맞으며 반대편 건물로 빨리 뛰어가는 대신, 옆에 놓인 우산을 집어 들고 물이 튀지 않게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나서 도착한 그곳에 놓인 우산꽂이에 들고 온 우산을 넣어 놓으면 된다. 여기서 저기로 가는 다음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렇듯 도쿄에선 비가 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우산은 어디에나 있고, 원한다면 살 곳도 많으니 말이다. 그리고 비가 와서 더욱 운치 있는 공간도 있다. 바로 미술관이다. 도쿄의 미술관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지어진 곳들이 많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이 오히려 좋을 수 있는 것이다.
후드득 빗방울이 닿는 소리와 자연이 만들어 낸 눈앞의 작품들, 도쿄의 비 내리는 어느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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