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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Oct 23. 2024

가부키초를 거닐다


몇 년 전일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처음 도쿄를 방문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 가부키초 Kabukicho 는 빨간 불이 깜빡거리며 위험신호를 보내는 피해야 할 곳이었다. 도쿄, 아니 일본 최대의 향락가, 어둠의 거리, 야쿠자, 호스트 클럽과 캬바쿠라(유흥업소), 러브호텔, 파친코(도박), 폭력 등.


카부키초라는 단어만 들어도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올랐고, 누구나 여자 혼자는 절대 그쪽으론 가지 말라고 얘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조언을 철저히 따르며 대낮에도 가부키초 거리엔 발도 들이지 않았다. 신주쿠 한 복판에 위치한 가부키초를 피해 가는 건 쉽진 않았지만, 목적지까지 일부러 멀리 에둘러 가더라도 그 지역을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마치 눈만 마주쳐도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처럼 말이다.




그새 천지가 개벽하기라도 한 걸까. 그랬던 내게 이제 가부키초는 어둠이 내린 도쿄에서 가장 안정감을 주는 곳이다. 거리를 메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늦은 시간까지 환하게 불을 밝힌 가게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사람들, 심지어 호객행위를 하며 발걸음을 붙잡는 일명 삐끼 hiki 들까지.


24시간 영업점이 판을 치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돌아다닌다는 게 전혀 낯설지 않은 서울이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 즉 나에게 가부키초 거리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땐 왜 그렇게 이 거리를 무서워했는지… 다시 찾은 도쿄, 그리고 처음으로 맞닥뜨린 가부키초는 오히려 군중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도쿄의 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생각보다 더 길었다. 단순히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커피숍이나 빵집, 길거리 노점 등 웬만한 가게는 5시, 6시면 문을 닫았고 음식점이나 이자카야도 밤 10시가 그들의 한계였다. 자연스레 도쿄의 일반적인 동네는 저녁 8시만 돼도 불빛 하나 없이 어둠에 잠겼다.


낮에는 공원의 푸르름이 싱그럽게 다가왔지만, 밤의 공원은 그저 지나가기만 하는데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나뭇가지에 달린 잎조차 공포감을 조성하는 무언가로 다가왔다.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이 주택가 골목에 울리는 건 내 발소리, 보이는 건 온통 까만색으로 뒤덮인 건물들 뿐이다. 어느 가정집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불빛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낮에는 세상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었던 이 동네가 밤에는 이리 돌변할 줄이야. 도쿄가 주는 이런 류의 도시의 고요함은 서울에서 온 나에겐 무척이나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올빼미형 인간이 아니었던가!




자연히 신주쿠 한 복판에서 낮이든 밤이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반짝이는 가부키초 거리는 저녁에 내가 갈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막상 가보니 도쿄의 어느 동네보다 안전하게 느껴졌다. 사람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내가 한창 활동하는 시간인 밤 11시에도 말이다. 심지어 새벽에 갈 수 있는 라멘집, 이자카야, 야키니쿠 가게도 있었다. 도쿄에서 이런 곳은 결코 흔치 않다.


그래서 나는 전략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신주쿠 지역에 숙소를 잡고 낮 동안엔 브런치가 어울리는 한적한 동네를 거닐다 저녁이 되면 다시 신주쿠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호텔에서 조금 쉬다 야식을 먹으러 가부키초 거리로 나간다. 바로 내가 늦은 밤 가부키초를 거닐 수밖에 없던 이유이다.


“도쿄의 밤은 낮보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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