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에 잠을 설치는 날이 길어지면서 얼마 전, 깔고 자면 시원하다는 여름용 풍기인견 침대 패드를 구입했다. 작년 초, ‘면계의 캐시미어’라는 수피마면의 부드러운 감촉과 통기성에 반해 사계절 침구 커버를 모두 수피마면 제품으로 교체한 지 일 년 만이다. 수피마면 침구는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다만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면서 누운 자리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한여름 무더위를 이기려면 좀 더 시원한 재질의 패드가 필요했다. 올해는 ‘듀라론 쿨’이라는 신소재를 이용해 만든 냉감 패드가 인기인지 많이 팔리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비교한 결과 오랜 세월 사람들이 추천하는 ‘원조’가 아무래도 낫겠다 싶어 풍기인견 패드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쇼핑은 성공은 아닌 것 같다. 바닥에 까는 패드 특성상 두께감을 위해 충전재로 솜을 누비고 그 위에 인견 커버를 씌웠는데, 몸에 달라붙는 느낌은 없지만 겉감이 얇아서인지 솜의 푹신함 때문인지 시원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견을 두세 겹 더했다면 시원했을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선 ‘에어컨 섬유’라는 호칭이 무색할 만큼 기능성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관리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인견은 얇고 마찰에 약해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게다가 열에 약해 건조기는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 자칫하면 섬유가 탈 수도 있다고. 욕조에 물을 받아 중성세제를 약간 풀어 패드 두 개를 넣고 발로 살살 밟아 세탁을 했다. 물을 머금은 솜 패드는 무거웠다. 패드 두 개를 욕조 바닥에 놓고 발로 밟아 대충 물기를 뺀 후 인견 부분이 안쪽으로 들어가게 잘 접어 세탁기에 넣고 섬세 모드로 탈수를 했다. 그리고는 이틀간 건조대에 널어 말렸다.
앞으로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그 정도쯤이야 일 년에 한두 번 손빨래하면 되지 생각하고 샀건만 바로 후회했다. 나는 먼지 청소를 자주 해줘야 하는 사람인데, 인견 패드는 마찰과 열에 약하니 며칠에 한 번씩 건조기의 이불 털기 기능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번 손빨래를 하기도 어렵다. 물건을 고를 땐 기능만큼이나 관리의 편의성을 중요하게 따져야 하는 건 기본인데, 이번엔 이를 간과한 것이다. 수십 년간 쇼핑을 했어도 여전히 중요한 부분을 놓칠 때가 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 고르기는 쉽지 않다. 이번에도 기존에 사용하던 있던 면 패드로 충분했는데, 굳이 구입하지 않아도 될 인견 패드에 돈을 낭비했다. 그치만 써봐야 아는 걸.
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추구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에센셜리즘(Essentialism)에 가깝다. 무조건 적게 소유하기보단 나에게 보다 더 필요하고 가치 있는 물건을 선별해 지니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ism’이라고 규정하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니다. 현재 나의 생각이 그러할 뿐 사람이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걸 항상 전제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같은 기능의 좋은 물건 한 개만 지니는 걸 좋아하는 나는 모순적이게도 그 물건 한 개를 찾기 위해 여러 물건을 사들인다. 글의 제목 ‘미니멀 쇼피엔스’는 ‘쇼피엔스(Shopiens)’는 ‘쇼핑(Shopping)’과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합한 말이다.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끊임없이 쇼핑하는 지금의 나를 말하는 동시에, 최소한의 쇼핑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나의 바람을 담은 중의적 표현이다.
가족이 생기고 3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 후 부쩍 쇼핑에 들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 한동안 내가 물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 쇼핑 목록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물욕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편안하고 안락한 집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집에서 주로 생활하는 내가 관심 있는 물건은 모두 집에서의 삶을 편안하게 도와주고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살림살이들이다. 나는 불편한 걸 잘 못 견뎌한다. 그런 나에게 집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의 편안한 쉼을 위해 마음에 드는 궁극의 물건을 찾을 때까지 쇼핑을 계속하고 있다.
내 쇼핑 사전에 ‘대충’과 ‘아무거나’는 없다.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나에게 가장 적합한 물건을 찾기 위해 비슷한 기능을 가진 여러 물건들을 비교하고 꼼꼼하게 자료 조사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이 물건이 나에게 꼭 필요한가를 다시 생각한다. 물건 살 때 별로 고민 안 하고 가장 많이 팔린 물건으로 덥석 구입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의 행위는 시간 낭비에 쓸데없는 짓일 수 있다. 내 반려인도 나에게 물건 하나 고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며 잔소리를 가끔 하는데, 그렇다고 집안에 들이는 물건을 아무거나 살 순 없다.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다.
본의 아니게 물건 하나를 고르기 위해서 여러 물건을 비교하다 보면 저절로 재료와 기능을 공부하게 되고, 물건 보는 요령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처럼 종종 시행착오를 겪는다. 열 번 쇼핑하면 두세 번 정도는 아직도 실패하는 것 같다. 상품평만 보고 샀다가 후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통 인터넷으로 쇼핑할 때 평점 낮은 순과 최신순으로 구매 후기를 꼼꼼히 확인하고 물건을 구입하지만, 상품평이라는 것은 주관적인지라 남에겐 좋은 물건이 나에겐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사용해 보기 전엔 내 기준에서의 장단점을 완벽히 알 수 없으니 일단 경험해봐야 한다. 그래서 쇼핑엔 끝이 없다. 어제까지는 유용하게 사용했던 물건이 오늘부터는 필요 없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기술은 발전하고 더 나은 성능을 가진 물건이 나온다.
비우기 위해 채우는 모순 인간
우리는 전부터 비움의 철학에 대해 들어왔다. 물건도, 마음도, 복잡한 머릿속도 내려놓고 비우고 사는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배웠다.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우려면 일단 채워야 한다. 내가 지금 핸드백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핸드백을 비울 순 없다. 오래전 누군가로부터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오히려 제대로 채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건이든 마음이든, 지식이든 일단 채워야 비울 수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채운 것이 없으니 비울 것도 없었다. 그전까지는 욕심내서 뭔가를 간절히 이루거나 가지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실체 없이 마음만 무거웠다. 그래서 일단 채우기 시작했다. 물건도 그랬다. 그러다 보니 어떤 걸 남겨두고 어떤 걸 비워야 할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두고두고 오래 쓰는 편이다. 그중에선 어릴 때부터 30년 정도 사용한 애착 홑이불과 애착 잠옷이 있다.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것 같은 여름용 홑이불은 아직도 여름이면 시원하게 감고 자고, 중학교 졸업식 때 산 순면 재질의 칠부 잠옷은 세탁도 많이 하고 하도 오래 입어서 면이 얇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즐겨 입는다.
오래된 물건은 단순히 물건과 사람과의 관계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은 쓸모를 다 해서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어질 때까지 곁에 두게 된다. 반면,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집에 쌓아두는 건 싫어해서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이 아니라면 새로운 물건을 들이면서 기존의 물건을 바로 처분해 버린다. 그런 면에서 당근마켓은 내 불필요한 살림살이의 정리를 도와주는 유용한 수단이다.
세상에 있는 수없이 많은 물건 가운데 나에게 맞는 하나의 물건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같은 물건이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닌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일단 경험해 봐야 좋은 것을 고르는 눈이 생긴다. 진짜로 내가 원하는 궁극의 물건 하나를 갖기 위해서는 여러 물건을 가져보고 경험해봐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잘 맞는 필요한 것을 남겨둘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쓸모를 가진 최선의 물건, 이 물건을 쇼핑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던가.
<미니멀 쇼피엔스>는 내가 소유한 물건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언젠가 한 번은 내 옆에 남아있는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 물건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과 물건에 얽힌 사연, 그리고 나에게 이 물건이 지니는 의미까지. 이 글을 시작으로 하나씩 짚어보려 한다. 모순 인간은 오늘도 미니멀 라이프를 외치며 쇼핑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