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영화대사처럼 비겁한 변명일지 모른다. 그저 짐작만 하고 진단받지 않는 게 나를 변호하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재적 ADHD의심인이다. 여러 유튜브 영상을 비춰 보며 저런 사고방식을 보이는 나는 ADHD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럼에도 정신과에 가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진단 뒤의 상황이 두려워서다.
ADHD가 맞다면 치료를 받겠지만 ADHD는 완치가 없다. 조용히 공존할 뿐. ADHD로 인한 어려움이 큰 사람은 잘 맞는 약을 처방받으면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된다는데 나는 그 정도로 폐해가 큰 편은 아니다.(내 생각일 뿐이다) 적극적으로 진단을 수용하고 온전히 따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약을 처방받아도 약을 과용, 오용하거나 약과 알코올을 혼용함으로 반작용이 생길 수 있기에 치료가 절실할 때까지 미뤄 두라는 말도 있다.
ADHD가 아니라면? 진단을 반박할 순 없겠지. 그냥 나의 모든 특이한 사고와 이상함이 모두 나인 것이다. 어디로도 피하거나 숨을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막막함을 느끼며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을 들었다.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다는 이야기. 그런 이상한 나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는 말. 변명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그 말이 너무 아팠다.
사람이 아니다. 그래. 사람이 아닐지도. 존재를 부정하는 이 말이 낯설지 않게 나를 따라다녔다. 어릴 적부터 느껴온 낯섦이 너무 많았다. 판타지 애니메이션들 중엔 다른 세계에 마물 슬라임으로 환생하는 이야기도 있던데 나는 외계에서 뚝 떨어진 생물체라도 되는 것 같다. 낯선 세상에 신기한 것뿐이고 왜 당연한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당연하게 통용된다. 오래전부터 이질감이 항상 따라다녔기에 처음 만나는 상황과 환경은 통으로 암기해야 했다. 처음 겪는 환경에 과하게 위축되어 주위를 살폈고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모든 게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너무 많은 정보로 머릿속이 과부하가 되면 더 이상 새로운 자극이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나는 너무 예민하면서도 또 너무 둔감한 채 지내왔다.
상식 常識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상식이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호기심을 가질 뿐이다. '보통'. 뛰어나거나 열등하지도 않은 중간을 지칭하는 이 단어가 낯설다. 보통에 들기 쉽지 않다. 어릴 때는 그저 조금 남다르게 노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또래와 소통을 못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처음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다. (그렇다. 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교실 어항 물을 갈아야 했는데 누가 시킨 일이었는지 내가 한다고 나섰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옆에서 알려준 어른이 없었던 걸로 보아 선생님의 혼잣말을 듣고 내가 해둬야지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다만 사각유리어항은 8살짜리 아이의 몸집보다 컸고 혼자 나르기엔 너무 무거워서 함께 어항을 나를 친구를 몇 명 더 구했다. 집에 어항이 없어서 물을 갈아본 적이 없었기에 물만 따로 덜어내고 새 물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무거운 유리어항을 물도 덜어내지 않은 채 통째로 들고 수돗가로 가려고 했다. 얼마나 무거웠는지 너댓명이서 몇 번이나 내려놓고 쉬면서 겨우겨우 꾸역꾸역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바닥에 잘못 내려놓으면서 어항 바닥을 깨뜨렸고 다행히 크게 다친 친구는 없었으나 모든 잘못은 주도한 내가 책임지게 됐다. 선생님은 나를 혼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크게 주의를 주셨다.
국민학교 3학년쯤? 과학 과목을 처음 배우면서였다. 매 수업 준비물이 있었는데 소금, 설탕 같은 거였다. 수업은 물질의 특성을 탐구하는 방식이었는데 색을 확인하고 만져보고 먹어보고 물에 녹여보는 것이었다. 지금에야 사소하지만 꽤나 과학수업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다음 시간 준비물도 잊지 않고 챙겼다. 문방구에서 황산구리 가루를 구입한 나는 혼자서 미리 확인해보고 싶었다. 파란색 황산구리 가루는 묘하게 달달한 향이 났는데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었다. 속을 태우는 듯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어지러움에 극심한 구토를 했다. 화장실에 달려가 한참을 뱉어내고 입을 헹궈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초등과정에서 다루는 물질들은 위험한 게 거의 없는데 (수산화나트륨, 에탄올 정도?) 예외적으로 위험한 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탓이었다. 뒤늦게 교과서를 확인하니 황산구리만 먹어 보는 과정이 없었달까.
나로서는 당연한 생각으로 당연하게 했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모든 것들이 낯설어서 섣불리 나설 수 없게 된 것 같다. 또 틀릴지 모르니까. 그렇게 거침없이 거르지 않고 움직이던 생각과 행동에 한 박자 제동이 걸리게 됐던 것 같다. - 그럼에도 사건사고는 계속 일어났지만 말이다. 오빠 친구의 멱살을 움켜 잡아서 단추를 뜯었던 일이나 동네 골목을 주름잡고 또래들을 다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일들이 계속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