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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다는 것

브뤼헤 할아버지

by ACCIGRAPHY




브뤼헤에는 핫한 백패커스(backpacker's)가 많았어요. 호스텔(hostel)이라고도 불리지만, 2000년 대 후반 중서부 유럽의 호스텔과 백패커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어요. 여행객과 방랑객의 차이랄까요?


제가 머물기로 한 백패커스 로비에는 작은 펍(pub)도 있었습니다. 투숙객 보다 현지인들로 붐비는, 너나 할 거 없이 테이블 위에서 타바코를 손으로 돌돌 말고 있는 모습이 자욱한 노란 조명과 어우러져 금방이라도 젤다 피츠제럴드(zelda fitzgerald)가 튀어나와,


"뭐 하고 있어? 춤 안 춰? 내일 죽을지 모를 인생이야!"


할 것만 같은 로비였죠. 그래서 저는 주머니에 꿈쳐둔 현금을 탈탈 털어 백패커스 주인에게 건넸습니다. 오래 있고 싶어서요.


저는 당시 잘 노는 인간들 특유의 순수함을 사랑했는데, 그 로비의 공기에는 없던 용기도 솟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그래서 길에서 글씨를 하나도 팔지 못한 날은 로비에서 글씨를 썼습니다. 다행히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죠.


그러다 친해진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어떤 사연인지 끝까지 묻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이 네 개 밖에 없었어요. 아니, 그냥 네 개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없는 손가락에 대한 결핍이 없어 보였거든요.


"언제까지 이렇게 여행하는 거야?"


할아버지가 물었어요.


"음… 저도 몰라요. 지금은 이게 좋아요.“


"그래. 아직 젊으니까. 근데 말이야... 훅 하고 지나갈 거야"


"뭐가요?"


"젊음."


속으로 '이 할아버지 너무 당연한 소리를 각 잡고 하시는 거 아니야?' 생각하며, 한숨 쉬듯 대답했어요.


"알아요."


"알아?(웃음) 너는 몰라. 여행도 좋지만 집에 있을 때도 좋을 자신 있어? 이것도 무슨 말인지 알겠지?"


또 속으로 생각했죠. '할아버지, 저는 젊음의 한가운데에서도 젊음을 아는 젊은이거든요?!'라고 목구멍까지 솟은 말을 겨우 눌렀던 기억이 납니다.


충고 듣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나이. 와중에 할아버지 말씀이 아직 뇌리에 남은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 정도는 귀를 열어 두었나 봅니다.


동네 주민이셨던 할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로비에 있는 젊은이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모습이 아고라 광장의 소크라테스 같기도, 그저 할 일 없는 동네 할아버지 같기도 했어요.


홀로 여행하는 동양 여성이 걱정되셨는지 '여행 시 주의 사항'같은 걸 적은 쪽지를 주시기도 하고, 오다 주웠다며 흰 종이봉투에 담긴 초콜릿도 여러 번 손에 쥐어 주셨죠.


동네 초콜릿 맛집이라는데, 벨기에 초콜릿은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성의가 감사해서 군불 때듯 입에 하나씩 넣으며 할아버지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죠.


브뤼헤를 떠날 때가 다가오자 이제 이야기꾼 할아버지를 못 본다는 생각에 서글퍼졌어요.


떠나는 날 아침, 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할아버지와 이메일을 교환했어요.


펜을 꾹꾹 눌러쓰면서,


내가 다시 할아버지를 못 보는 마음과

할아버지가 다시 나를 못 보는 마음의

온도차가 느껴졌어요.


생의 말미에 있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훨씬 뜨거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어요.


애써 웃으며 씩씩하게 돌아서서 기차역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참았던 눈물을 고개를 휙휙 돌리며 길에다 털어냈어요. 제가 경미한 결벽증이 있어서 눈 근처를 잘 안 만지거든요. 특히 여행할 때 아프고 싶지 않아 생긴 이상한 버릇 중 하나였죠.


그렇게 기차에 올라타 긴 날숨을 내쉬던 중 누군가 제 어깨를 톡톡 두드렸어요.


"실례지만, 어떤 할아버지가 이걸 좀 전해주라고..."


봉투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어요.

흰 종이봉투에 초콜릿이 가득 담겨 있었죠.


제가 걸음이 빠르거든요. 할아버지가 기차역까지 초콜릿 손에 쥐고 지팡이 짚고 헐레벌떡 오시는 모습을 상상해 버렸어요.


겨우 털어낸 눈물이 다시 차올라 오스텐드(oostende)로 가는 내내 입에 할아버지 초콜릿을 머금고 할아버지와 했던 모든 대화를 기억하고 또 기억했어요.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할아버지 덕분에 저는 집에 있어도 괜찮은 법을 어려서부터 궁리하게 되었고, 할아버지가 의도한 '집에 있다'는 의미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 초콜릿 사진을 보여드리려 클라우드를 뒤적이다 끝내 실패했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을 조금 방출해 봅니다. 2005년에서 2009년 사이의 사진들이고요, 위에서 왼쪽 순으로 자그레브, 인스브루크, 그라츠, 위트레흐트, 자그레브, 겐트, 로잔, 브뤼헤, 바젤입니다.





*최근 브뤼헤에 다녀오신 램즈이어 작가님의 글에 의해 촉발된 기억입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해 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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