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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나나를 찾아서

do not fear

by ACCIGRAPHY




바나나를 꼬박꼬박 상온에 두고 먹었다. 그러다 보니 끝으로 갈수록 열에 서너 개 정도는 버석한 설탕가루 먹듯 우적우적 해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바나나 사러 가는 날이 토요일 아침이니 목요일 즈음 되면 실망스러운 바나나만 남게 되었다. 그러던 어떤 금요일 아침, 초고도로 숙성된 점박이를 까서 한입 베어 물었는데, 치가 떨리는 단맛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나도 모르게 어떤 결심에 이르게 되었다.


‘흠…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다음 바나나는 그냥 냉장고에 두고 먹어봐야겠군. 갈색 괴물로 변한다 해도 이것 보단 낫겠어.’


드디어 결전의 날. 멕시칸 마켓에서 노랑과 연두가 적절히 섞인 바나나를 한 손 가져다 바로 냉장고에 넣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왠지 비닐 포장을 벗기고 싶지 않아 그대로 넣어두고는 하나씩 일주일을 꺼내 먹었다.


맛있었다.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맛있어서 먹을 때마다 헛웃음이 났다. 노랑과 연두는 점점 퇴색되어 갔지만 갈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랑에서 머스터드로, 연두에서 올리브그린 정도로의 변색이었고, 무엇보다 상큼한 단맛이 오래 유지되었다.


이미 다 숙성된 바나나를 넣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일단 내 바나나는 노랑의 길목에 있는 연두였다. 갈색의 길목에 있는 노랑을 넣었더라면 바로 칙칙해졌을지도 모른다. 알 수가 없는 일을 지레짐작하지 않는다.


일단 나는 내 입맛에 맞는 바나나를 오래 먹는 법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고, 이는 내 삶에 지대한 의미를 지니므로 이렇게 구구절절 글로 써 보는 것이다.




바나나 사러 가는 길에 남편이 하나의 제안을 했다.


"당신 LA강에서 전기자전거 타 볼래?"


"아니."


"왜?"


"거기는 자전거 잘 타는 사람만 쌩쌩 달리는 곳이라서 무섭고, 나는 전기자전거 무거워서 싫어."


"아니야. 재밌을 거야."


"아니. 나는 패들보드처럼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조용하고 개인적인 스포츠 좋아해. 그리고 나는 끼어드는 거 잘 못해. 어릴 때 단체줄넘기하는데 다른 친구들은 잘만 뛰어들어가는데 나만 못 들어갔어. 자전거들 쌩쌩 달리는데 거기 어떻게 들어가. 나는 못 해."


뒤돌아보면 나는 겁이 없는 듯 많은 학생이었다. 담 넘어 학교 다닐지언정 단체줄넘기는 무섭고, 사람들 앞에서 신나게 노래는 불러도 자기소개는 너무 무서운 사람.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인데, 남편 잘못 만나 이 나이에 단체줄넘기를 해야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단체줄넘기 못해도 이건 할 수 있어. (웃음 참으며) 그 둘은 매우 다른 행위야."


"본질적으로 같아. 안 갈래."


분명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LA 강둑에 와 있었다. 남편은 미소 띤 얼굴로 차에서 자전거 두 대를 내려서 재조립하고 있었고, 나는 차창을 거울삼아 비장한 표정으로 헬멧 버클을 채우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자전거 도로에 진입을 시도했으나, 스무스한 남편의 입장과 달리 나는 공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한번 멈춰 섰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정말 충분한 거리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힘차게 끼어들었다. '끼어들었다'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앞뒤로 휑했지만, 내게 그 길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단체줄넘기 로프였다.


진입했다는 안도감에 긴 숨을 내쉬며 열심히 발을 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나를 기다리던 남편이 보였다. 내가 오는 걸 보고 다시 길로 진입하며 그가 소리쳤다.


"당신도 들어올 수 있게 넉넉히 들어갔는데 왜 멈췄어. 그러면 더 위험해!"


"남의 판단 믿고 가는 게 더 위험해. 어차피 만났으니 됐어, 얼른 가."


서로 조금씩 일리가 있는 듯하여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고, 우린 그저 한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왼편 강으로는 온갖 초록이 오른편 벽에는 그래피티가 무성했다. 내가 만들어내는 속도감을 느꼈다. 막상 들어와 보니 별 거 아니었다. 그렇게 남편 잘못 만난 덕에 단체줄넘기에 묶여있던 어린 아찌의 회한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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