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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진 Sep 16. 2024

책연

추억은 도미노

나는 책에도 연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A라는 책이 내 눈에 들지도 않았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어떤 시기가 되면 그 책이 나를 이끄는 것만 같은 그런 때가 있다. 혹은 B라는 책을 샀는데 잘 읽히지도 않고 와닿지가 않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읽었을 땐 몰입도 잘 되고 끝내 인생 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책이 잘 읽지 않을 땐 억지로 붙들고 있기보단 '너는 아직 나와 인연이 아니구나.'하고 책장에 다시 꽂아두는 편이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책을 읽었고 마음이 닿아 읽게 되면 그 책은 삶에 깊게 남게 된다.

관심도 없던 책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처음 한 건 아마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책상 아래에 있는 책꽂이에 찾을 게 있어서 책상 아래에 들어갔다.


아주 짙은 갈색의 원목 책상 아래는 한 쪽은 서랍으로 한 쪽은 책장으로 뒷면은 벽으로 막혀있어서 아주 캄캄했다. 그 좁은 곳에 기어 들어가서 책꽂이를 이리저리 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이라는 책이다. 그때 한창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꽂혀서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책을 많이 샀던 기억이 있다. 산 걸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그 어두운 곳에서 새빨간 표지 위에 '붉은 손가락'이라는 글씨가 눈에 박혔다. 그러 고는 그 자리에서 그 쭈구린 자세로 책을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스토리가 전부 생각나진 않지만, 책을 읽은 공간과 어두운 분위기,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내 또래 아이였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그렇게 읽은 책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그 상황과 함께 남아있다. 그리고 가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추천해달라는 사람이 생기면 <붉은 손가락>도 곁들여 알려주게 되었다.


가끔 잠에 들지 못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평소에도 생각이 많은 편이라 잠에 쉽게 드는 편은 아니지만, 정말 미치도록 자고 싶은데 누운 지 4시간이 넘도록 잠들지 못하는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겨우 잠에 들곤 했다. 그렇게 잠들어도 악몽을 꿔서 울면서 깨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은 잠들고는 싶지만 또다시 악몽을 꿀까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밤이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내 방에 있는 책장을 훑어봤다. 나는 왜 자기 전에 책 읽을 생각은 못 했지. 그리고 꺼내든 책은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 이었다. 잠이 오기는커녕 책이 술술 읽혀 너무 즐거웠지만 다행히도 악몽은 꾸지 않게 되었다. 눈을 감으면 책 속에 등장했던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다니던 환상 속의 지구가 펼쳐졌다. 너무 책에 깊게 빠진 날에는 일기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쓰곤 했다. 그들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캐릭터였지만 나를 잘 자게 해준 것이 고마워서 김초엽 작가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구 끝의 온실>을 시작으로 김초엽 작가의 거의 모든 책을 사서 자기 전마다 '김초엽 타임'을 가졌다. 원래도 SF 장르를 좋아했는데 그 분야를 책으로 접하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초현실주의 장르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22년 베스트셀러였던 룰루 밀러 작가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은 많이들 들어봤을 것 같다. 나는 베스트셀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가 극찬을 했던 책이다. 거의 한 시간가량의 리뷰가 유튜브에 올라왔길래 영상을 보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기 위해 책을 샀다. 하지만 나는 2022년 베스트셀러였던 책을 2024년 1월이 되어서야 다 읽었다. 무려 2년이나 뒤처졌다. 첫 시작은 장대했다. 무슨 내용이길래 베스트셀러일까. 왜 극찬을 받을까 기대하며 시작한 독서는 앞부분에서 막혔다.

너무 읽히지 않았다. 활자가 자꾸 튕겨져 나갔다. 첫 번째 시도를 실패하고 몇 개월 뒤 다시 시도했을 때 또 똑같은 곳에서 포기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시도도 비슷한 곳에서 실패했다. 시간이 지나도 읽히지 않아 거의 반 포기 상태로 책장에 꽂혀 외면당했다. 2023년 말, 한 해의 마지막과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을 어떤 책으로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쭈구려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펼쳤지만 그동안 몇 번이고 시도했던 탓에 앞부분이 기억이 났다. 그래서 포기했던 그 지점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고, 12월 31일부터 자기 전마다 읽기 시작해서 3일 만에 다 읽었다. 내용은 충격적일 정도로 나에게 와닿았다. 지금 딱. 지금 나에게 필요했던 내용이었다. 끝없는 우주 속에서 먼지 같은 내가 그럼에도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느꼈다. 역시나 책에도 인연이 있다는 걸을 느끼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또다시 내일을 위해 잠이 들었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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