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오경석, #004 오경석의 중국 방문과 주요 업적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by 연결고리

주요 업적과 생애 요약


#004 오경석의 중국 방문과 주요 업적


청년 오경석이 역과에 합격한 것은 그가 16세가 되던 해로 이때는 헌종이 왕이었던 세도정치 시기였습니다.

세도정치는 잘 알려지다시피 정조가 죽은 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의 외척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였으며, 정치적 부패가 만연했던 때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양반층의 부패상을 목격했지만 자신의 신분적 위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돌아가는 일에 거리를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3세가 되던 해, 청년 오경석은 인생에 큰 변화를 겪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사신단에 참여한 것인데, 그는 베이징에 머무르며 중국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그 ‘현실’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이 숭상하는 중국이 아편전쟁에 참패하여 서양에 의해 강제 개항 당한 이후 중국이 서서히 붕괴해가는 상황을 의미합니다.1)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현실’을 목격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조선에도 그 ‘현실’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오경석이 그랬습니다.



그는 중국을 처음 방문한 이래 조선 정부를 대표하여 베이징을 수차례 왕래하는데, 그 위기의식 때문에 중국의 지식인들과 적극 교류하고 서양 문물도 직접 구입하여 연구하면서 서서히 개화의식을 갖게 됩니다.2)



이렇게 국제 정세를 심각하게 여긴 오경석은 두 번째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또다시 서양에게 패한 후 황제가 수도를 떠나 도망가는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시 사신단은 이 충격적인 상황을 고조에게 보고하였고, 오경석의 위기의식은 더욱 커집니다.3)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반층은 이런 긴박한 위기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고, 외세의 침입을 적극적으로 대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오경석의 위기의식은 ‘현실’로 나타납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가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으로, 이 사건이 발발하기 직전 36세의 청년 오경석은 중국에 사신단으로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외교사절의 대표들이라고 하는 양반 외교관들은 전문적인 외교 지식도, 정보를 얻을 인맥도 없어서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합니다.



이때 오경석은 독자적인 노력으로 중국의 정보원들을 찾아다니며 프랑스의 정세를 파악하였고, 조선이 프랑스와 대결할 때 필요한 각종 정보를 수집·정리하여 이를 조선 정부에 알립니다. 이 정보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4)



병인양요에서 교훈을 얻은 그는 자주적인 개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국이 통상을 요청하자 개국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개항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것은 양반 지배층의 주류 분위기와 배치되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망각한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국가의 위기를 걱정하여 끝까지 의견을 내세웠고, 예상대로 쇄국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개항가’라고 지목되어 배척당합니다.



개항을 주장한 오경석이지만 미국에 의해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그는 단호히 대결할 것을 주장하였고, 사건이 종결된 뒤 베이징에 가서 신미양요를 수습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합니다.5)



자신의 주장이 거절되고 정치적 입지도 좁아진 상황이었지만 그는 나라의 위기가 중요했고, 그것을 자신이 나서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쓴 의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이미 흥선대원군을 통해 수차례 조선의 개화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더이상 설득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그는 직접 행동하기로 합니다. 그것은 개화사상을 가진 양반 박규수와 함께 조선 최고 신분의 양반 자제들을 개화세력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교육받은 이들은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갑오개혁을 주도하는 개화파가 됩니다.6)



46세의 오경석은 최초의 근대조약이며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최대한 조선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서도 노력합니다. 당시는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쇄국을 주장하는 세력, 민씨 세력을 중심으로 청의 의견에 따라 무조건적인 개항을 주장하는 세력, 그리고 오경석·박규수와 같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개항을 주장하는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민씨 세력에게 있었으므로 고종은 청의 개국 권고에 따라 개항하게 되며, 오경석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오경석은 조약 체결 당시 나라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노심초사 하다가 과로로 인해 병을 얻게 됩니다.6)



정부에서는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의 공로를 치하하여 중인으로서는 얻기 어려운 종1품의 명예직을 그에게 수여하고, 아들이 역과에 합격하는 기쁨도 누리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강화도조약 체결 3년 후, 남편을 간호하던 아내가 건강이 나빠져 갑자기 먼저 세상을 뜨고, 아내 사망 8일 후 오경석도 4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참으로 허망한 죽음입니다.



권력을 지니지 못한 중인 출신의 청년은 나라의 위기를 걱정하여 외국의 자료를 모아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연구하였고, 우려했던 제국주의 국가와의 충돌이 발생하자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자주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개화시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리학적 시대의 한계에 부딪혔고, 살아있을 때 자주적 개화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노력이 헛된 것일까요?



그가 교육한 양반 엘리트 자제들은 훗날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개화를 주도하였으므로 청년의 도전은 당시에는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 신념은 다음 시대에 계승되어 역사를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이 청년이 도전해야 할 이유이고, 청년의 도전이 멈추지 말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청년을 위한 청년의 역사


1) 김현아, 「(조선청년에 개화사상 전파해)위기의 조국 구하려 한 역관 오경석」, 『국회보』 544, 국회사무처, 2012.3, 11쪽
2)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47쪽
3)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6쪽
4)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0쪽
5)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6쪽
6)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68-169쪽
7)「오경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8)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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