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오경석 가문은 아들 오세창(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을 포함하여 8대에 걸쳐 통역관을 배출한 대표적인 역관 집안이었습니다.1)
오경석은 1831년 서울 중구에서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3품의 당상역관을 지닌 인물로, 당상관은 3품 이상의 고위직을 뜻합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층으로 승진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최고 직위는 3품까지였고, 그 이상은 ‘명예직’으로만 수여되었으니 전문성은 뛰어났지만, 신분제도라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2)
역관들은 직업적 전문성 때문에 문과를 합격한 양반보다 훨씬 자부심이 컸을지도 모릅니다. 당시는 매관매직이 일상화된 세도정권 시기였던 만큼 돈을 내고 권력을 거머쥔 양반이 많았습니다.
고종이 집권한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19세기 말 전국의 수령·방백(지방관) 중 3분의 2가 돈을 내고 벼슬을 샀다고 하니 그 부패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3) 과거시험에서의 부정행위도 큰 문제였습니다.
양반들은 부정과 비리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미 도덕성과 실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신분적 특권을 내세워 자기들의 이익을 좇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 중국을 방문한 조선 사신단의 고위 문관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어를 잘하지 못했고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외교협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입니다.4)
이런 상황에서 중인 통역관은 단순히 의사소통을 넘어 양반 외교관의 업무까지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외교 실무에 정통한 중인 통역관은 외교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양반 사신단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통역관의 의견이 묵살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5) 이런 양반들의 형편없는 실력과 자신의 신분적 한계에서 오는 회의감 때문에 오경석은 극히 일부의 양반들과만 교유했는지도 모릅니다.
통역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통역 상황에서 어학 실력이 바로 판별되기 때문에 일부 양반들의 서투른 실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실력이 월등했습니다.6)
역과(譯科)에 합격하더라도 그 실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중국에 파견되지 못하므로 통역관은 그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통역관 집안에서는 그들의 자식을 역과에 합격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교육을 했습니다.
오경석이 받은 교육은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했던 사례를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오경석은 아들 오세창이 8세가 되던 해부터 역과 시험 준비를 시킵니다. 집에 공부방을 따로 설치하고 개인 교사를 초빙하여 교육을 진행했는데, 오세창은 이때부터 무려 8년간의 집중적인 공부 끝에 역과에 합격합니다.7)
근대적 공교육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조기학습이 현재의 교육 방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렇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 기술관으로서의 통역관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8대에 걸쳐 통역관을 배출했으니 오경석 가문은 통역관 가문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가문이었고, 이러한 학문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오경석의 아버지나 오경석이 역관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8) 그렇기 때문에 오경석은 학문에 있어서는 양반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오경석의 집안은 경제력도 대단했습니다. 중국에 파견되는 통역관은 정부의 묵인 아래 중국인과의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9)
중국과의 무역품은 고려 시대부터 중국에서 인기가 대단했으며 가격도 비싼 인삼이었습니다. 오경석의 아버지는 인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이를 오경석에게 물려주었고, 오경석 역시 인삼 무역으로 많은 이윤을 남겼습니다. 오경석이 중국에서 서적이나 신문물을 구입하고, 중국인들에게 고가의 책 등을 선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관이라는 학문적 실력, 무역을 통한 부유한 경제력을 고려할 때 오경석의 집안은 통역관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집안이었습니다.10) 이렇게 성공한 가문에서 뛰어난 교육을 받은 오경석이었지만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 실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전근대 시대 오경석이 마주한 한계였습니다.
1)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09쪽
2)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1쪽
3)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3, 인물사사상사, 2007, 135쪽
4)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5쪽
5)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0쪽
6)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2쪽
7)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3쪽
8)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3-114쪽
9)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2·114쪽
10) 김현아, 「(조선청년에 개화사상 전파해)위기의 조국 구하려 한 역관 오경석」, 『국회보』 544, 국회사무처, 2012.3, 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