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오경석, #002 개화사상의 비조가 된 청년통역관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by 연결고리

시대상황


1840 청, 1차 아편전쟁 발발

1846 오경석 관직 합격

1850 세도정치의 마지막 왕인 철종 집권 / 오경석 20세

1853 오경석 청에 처음 파견

1854 일본, 미국에 의해 개항

1856 청, 2차 아편전쟁 발발

1860 서양, 베이징 약탈(오경석 청에서 상황 목격) / 오경석 30세

1862 임술농민봉기 발생

1863 고종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1866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오경석 청에서 조선에 정보 제공)

1868 일본, 메이지유신

1871 신미양요




주요 업적과 생애 요약



#002 개화사상의 비조가 된 청년 통역관



19세기. 당시의 세상은 조선 사회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급변하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세상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해야 했지만, 불행히도 동아시아의 조선은 중국·일본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폐쇄적이었습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淸)은 수도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의 광저우에서만 외국 상인들의 상행위를 허용하며 외국인들의 활동을 통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여러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고, 개항장에 외국인 거류지역인 조계(租界)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곳은 외국인의 자유로운 상행위가 허용되고 치외법권이 적용되기 때문에 서양인의 활동은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이후 외국인들은 내지 여행의 권리를 얻고 수도 베이징에 머물게 됩니다.



청 이전 시기부터 선교사 등 많은 외국인이 중국을 방문했고,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거주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서양의 정보를 가장 많이 확보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중국에서는 서양의 상황을 담은 책을 발간할 수 있었고 이 책들은 조선과 일본에 전해집니다.



일본 에도막부의 경우에는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인 데지마에서 이미 네덜란드 상인과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은 이곳에만 상주할 수 있고, 허가가 있는 경우에만 수도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에도(도쿄)의 지식인이 서양 정보를 얻는 수준보다 나가사키 인근의 네덜란드어 통역관이 서양 정보를 얻는 수준이 훨씬 높았습니다.



한 예로 네덜란드 학문 중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의학 분야인데,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통역관들과는 달리 에도의 학자들은 서양 의학에 관한 정보를 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저 네덜란드인이 수도에 방문할 때만 그들과 직접 만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1)



정보 획득에 있어서 외국인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혜택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나가사키는 외국 문물 수용의 창구로 활용되었는데, 에도막부가 미국의 무력시위로 개항하게 되자 서양과의 교류지점은 더 많아집니다.



반면 조선은 중국·일본과의 교류 이외에 서양 세력과의 통상은 금지되었습니다. 외국인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과 자국인이 해외로 나가는 것 모두 금지되었으므로 세상의 변화에 둔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에 조계가 설치된 것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이기 때문에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일반인은 물론 정부 관료조차 조선 내에서 외국인의 활동을 직접 보고 판단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서양은 발전된 기술 문명을 바탕으로 무력 침략을 이미 시작했지만, 조선은 성리학적 사고관에 갇혀 여전히 서양을 단순히 오랑캐, 열등한 민족으로 인식할 뿐이었습니다.



지배층의 잘못된 우월의식에 근거하여 서양을 알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누가 감히 바꿀 수 있을까요?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배층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제국주의의 억압을 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나서서 ‘변화’를 주장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세상의 변화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에 변화를 주장하는 의견도 다른 사람보다 설득력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개화기에 조선을 탈바꿈시켜야 할 일차적 책임은 ‘통역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을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던 당시, 유일하게 국경을 벗어나 외국어 구사가 가능했던 ‘통역관’은 정보 수집 역량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통역관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신분적 지위도 높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을 통해 번역 서비스를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실시간 각국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외국 사람들과 교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통역관처럼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다른 나라의 미묘한 사회적 분위기나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국가의 정치적 상황 등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외국 세력이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침략을 계획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라면 전문통역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격동의 시대에 가장 먼저 살펴볼 인물로 오경석을 선정하였습니다. 오경석은 조선 후기 통역관으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개화사상 3인의 비조(鼻祖, 어떤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나머지 두 명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청년 오경석이기 때문에 그는 독보적인 ‘개화사상의 비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2)



통역관으로서 개화사상의 비조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조선 시대 신분제도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사람을 크게 양인(良人)천인(賤人)으로 구분했습니다. 양인은 세금을 내는 대신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며, 천인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해 세금을 내지 않을뿐더러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습니다. 이런 조선의 신분제도를 양천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인 안에서는 양반, 중인, 상민의 서열이 존재했고 이에 따른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양인의 가장 큰 혜택인 과거시험은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로 구분되고, 이 중 과거의 꽃은 문과였습니다. 문과는 예외상황이 존재하지만, 원칙은 3년에 한 번씩 실시하고, 3단계의 시험을 거쳐 33명을 선발합니다.



시험 준비에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금의 입시 경쟁처럼 과목 수, 준비 방법, 응시 제한 등의 여러 상황을 고려한 눈치작전이 펼쳐졌고, 지원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시험 준비에 20년 가까이 소요되다 보니 목숨을 건 부정행위도 빈번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시험 합격으로 얻는 명예와 지위는 대단했기 때문에 60세가 넘어서도 도전을 포기할 수 없었고, 합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체면을 차리려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3)



이렇게 시험에 합격한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지위를 유지하게 되는데, 문과와 무과에 합격한 사람을 각각 문반(文班), 무반(武班)이라고 지칭하고 이 두 세력을 합쳐 양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조선 최고의 신분층이 되며, 그 지위를 독점하였습니다.


잡과는 어감도 좋지 않지만 양반 가문에서 지원하지 않는 기술관을 양성하는 시험입니다. 여기에 합격한 사람은 중인층을 형성합니다. 이들은 통역이나 의학, 산술 등의 전문 기술관들이지만 양반에 의해 신분적 차별을 받았으며,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있었습니다.4)



이들은 조선 후기에 두각을 드러내지만 철저한 신분 사회 속에서 양반의 명령을 수행하는 행정 실무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인은 양반과 농업·상업·수공업 등에 종사하는 상민 사이에 끼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개화기라는 격동의 시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의 때에 역사를 바꿀 힘은 양반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화사상을 ‘최초’로 형성시켜 역사를 개척한 인물은 양반의 차별을 받았던 중인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는 이렇게 시대적 한계를 지닌 한 청년의 도전으로 시작됩니다.



청년을 위한 청년의 역사


1) 마리우스 B.젠슨, 『현대일본을 찾아서』1, 이산, 2006, 317-318쪽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p.15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08쪽
3)「문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장재천,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시험문화의 고찰」, 『한국사상과 문화』39, 한국사상문화학회, 2007, 137-145쪽
스토리테마파크-일기와 생활(story.ugyo.net), 「과거시험, 10대와 60대 수험생의 동시 수석 합격」, 한국국학진흥원


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5, 국사편찬위원회, 2002,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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