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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las Jan 13. 2023

작품을 불태우겠다고요? - 데미안 허스트

The Currency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이하 데미안)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죠. 유명한 만큼 그에 대한 자료와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그가 진행했던 NFT 프로젝트 ‘The Currency(화폐)’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해요. The Currency는 기존 작품 활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만큼 데미안이 그동안 진행해 온 작품 활동을 토대로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데미안 허스트가 어떤 예술을 해왔고, 자신의 원래 작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NFT로 전환했는지를 보면 데미안이 괜히 유명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과정만 따라가 봐도 덩달아 똑똑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죠. 데미안이 그 명석한 두뇌를 NFT아트에 어떻게 적용했는지 한 번 볼까요?


죽음, 돈 그리고 예술

NFT아트를 보기 전에 데미안이 어떤 예술가인지 대략 알아볼게요. 우선 논란이 많습니다. 작품의 주제가 대체로 ‘죽음’인데 ‘실제 죽음’을 전시해 사람들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주죠.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에 넣어 생생한 상어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거나 소를 절반으로 갈라 시체 내부를 공개하는 방식입니다. 실제 사람의 두개골을 다이아몬드로 장식해 팔기도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소재는 예술에서 아주 흔하지만 영혼이 떠난 사체를 실제로 이렇게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너무나 자극적인 소재와 방법 때문에 그의 전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죠.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Mother and Child (Divided)


데만안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것을 예상했을 겁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과감합니다. 논란을 예상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면 꼭 해냅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더욱 적극적입니다.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술은 비평보다 구매자가 필요하다.” 구매자가 생기려면 잠재 고객이 많아야 하고, 잠재 고객이 많으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려면 아무래도 자극적일 수밖에 없겠죠. 물론 그의 예술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CHERRY BLOSSOMS'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만든 작품이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죠.

CHERRY BLOSSOMS

비즈니스 예술가

예술로 돈을 벌려면 아주 뛰어난 사업 수완이 있거나 운이 따라야 할 겁니다. 예술로 돈을 버는 일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름이라도 들어 본 아티스트들은 0.01%에 속하는 스타 작가일 가능성이 높죠. 예술가가 돈을 벌면 예술의 가치를 훼손할 것만 같은 편견과 예술 시장 규모의 한계 등으로 많은 예술가들은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성공을 하게 되면 매우 큰 부와 명예가 따르기도 합니다. 피카소와 앤디 워홀처럼, 그리고 데미안 허스트처럼 말입니다.

Artist As Rock Star | Sep. 15, 2008 | TIME

데미안은 5천억 원에 육박하는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업가로 보기도 하죠. 단순히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매니지먼트 업계 출신의 비즈니스 매니저를 고용하면서 더욱 큰돈을 벌었고,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도 찰스 사치라는 영국 미술계의 초대형 컬렉터이자 갤러리 소유자의 후원을 받으면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찰스 사치는 현대 미술 작품을 엄청나게 수집했는데 그가 세운 사치 갤러리는 현대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요. 데미안은 영국 현대 미술의 부흥기를 이끈 예술가 집단인 yBa(young Britich artists)의 주요 멤버였는데 뛰어난 기획력으로 동료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고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보던 찰스 사치가 그들의 작품을 수집하며 그들의 인연은 시작됩니다. yBa에는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Marc Quinn),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 등 우리나라에도 꽤나 알려져 있는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고 현재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오른쪽)와 찰스 사치(왼쪽) | The guardian

찰스 사치는 벤처 투자자(VC)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떡잎이 남다른 초기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한 후 세계 최대 광고회사(Saatchi & Saatchi)를 키워냈던 마케팅 역량으로 흥행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사치의 든든한 후원으로 본격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데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후원자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비즈니스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데미안 허스트가 NFT에도 진출합니다.


궁금한 건 못 참지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영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국민 예술가로서 명예를 누리는 그가 왜 NFT를 시작한 걸까요? 그는 아마도 몹시 궁금하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자신의 실물 작품과 NFT 중에 어떤 것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지 말입니다. 또 자신의 작품을 NFT로 전환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기존 예술계에서는 이미 너무나 유명한데 새로운 예술 세계인 NFT아트에서도 '내가 통할지' 궁금하지 않았을까요? 다양한 실험적 예술을 시도해 온 데미안은 역시 일반인에게 낯선 영역인 NFT에서도 뭔가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게다가 2021년 광풍처럼 몰아친 NFT시장의 성장은 비즈니스 감각이 남다른 데미안에게 새로운 시장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NFT작품 하나가 800억 원 가까이 판매되는 기록을 세우면서 시장의 열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2022.03.21

데미안이 자신의 작품 제작 과정을 360도 동영상으로 촬영하면서 직접 설명을 할 정도로 기술 친화적이라는 점도 NFT 여정을 시작한 또 다른 이유일 수 있습니다. NFT아트는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특히 기술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블록체인뿐만 아니라 암호화폐로 거래를 하거나 로열티를 설정하거나 새로운 마켓 플레이스를 이용해야 하는 등 다양한 기술적 장벽이 있는데 오히려 그에게는 호기심에 불을 댕기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360도 카메라로 자신의 작업 과정을 공개한 데미안 허스트(아래 유튜브 링크 참고)

그뿐이 아닙니다. 2021년은 같은 영국의 비주류 예술계 슈퍼스타인 뱅크시의 작품이 NFT로 만들어지며 큰 화제가 된 해입니다.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 터너상을 수상한 주류 예술의 대표주자이자 언제나 주도적으로 예술 시장을 개척해 온 데미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죠? 뱅크시의 작품이 NFT로 만들어진 4개월 후인 2021년 7월, 데미안은 직접 NFT 프로젝트를 론칭합니다. 바로 ‘The Currency’입니다.


강요와 선택의 기로

데미안은 2016년부터 제작해 온 실물 작품 ‘The Currency’를 NFT로 전환하며 NFT 세계에 데뷔합니다. The Currency시리즈는 얼핏 다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다릅니다. 제목도 작품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에 고유의 차별화된 가치가 있어 자신이 소유한 작품에 더욱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작품이라도 마음에 드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다면 더 높은 가격으로 살 수도 있을 겁니다.

The Currency 시리즈
The Currency

이 프로젝트는 종이에 그려진 실물 원본 1만 개와 각각 매칭되는 NFT 1만 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NFT 1만 개는 개당 2천 달러로 모두 판매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묘미는 지금부터입니다. 데미안은 NFT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1년간 고민을 해보고 2022년 7월까지 작품의 실물과 NFT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NFT구매자들 그대로 NFT만 가질 수도 있고, 실물을 원한다면 NFT를 없애고 실물을 가지도록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구매자들은 꽤나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과연 어떤 선택을 더 많이 했을까요?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구매자라면 실물과 NFT 중 어떤 것을 선택하실 건가요? 선택되지 않은 하나는 무조건 소각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4851 : 5149?

짜잔. 1년 후 결과가 나왔습니다. 4851 VS 5149. 어느 쪽이 많을까요? 구매자 중 4,851명은 NFT 작품을, 5,149명은 종이로 제작된 실물을 선택했습니다. 얼핏 비슷한 비율로 선택한 것 같죠? 하지만, 1만 개 중에 1천 점은 처음부터 데미안 본인이 자신의 소유로 할당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자신이 소유한 1천 개 전부를 NFT로 선택해서 자신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표명합니다. 결과적으로 NFT를 선택한 사람은 3,852명, 실물을 선택한 사람은 5,150명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 한 명이 여러 개의 NFT를 보유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마저도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물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NFT보다 실물 작품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Artforum.com

어찌 됐건 NFT를 선택한 사람들의 1:1 매칭이 되는 실물 작품은 모두 소각되었습니다. 데미안은 직접 방화복을 입고 여러 작업자들과 함께 수백 개에 달하는 작품을 소각로에 넣으며 이 장면을 소셜 미디어로 생중계합니다.


작품들을 소각하며 데미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NFT와 실물 중) 무엇이 더 가치가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NFT와 실물 중) 무엇이 더 좋은 것일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여전히 몰라요.
하지만 NFT가 실물 작품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The Currency 실물 소각 영상

그는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보유했던 1천 개를 모두 NFT로 선택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비쳤습니다. 말은 신중하게, 행동은 확실하게. 데미안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호기심 많은 예술사업가의 가치 실험

그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측정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흔한 수단이 바로 The Currency, 즉 화폐이고, 이 화폐로 표현된 ‘가치’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NFT의 가치를 실물과 비교해 보고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사실 2016년 The Currency가 실물작품으로 만들어질 때에는 "언제 예술이 변화하여 화폐가 되고 언제 화폐가 예술이 되는지, 바로 그 화폐와 예술의 경계를 탐구한다"라는 주제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술이 화폐가 되고 화폐가 예술이 된다'는 것은 예술과 화폐 사이의 치환, 즉 '거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손쉽게 예술 작품이 거래되는 NFT시장의 성격과 맞아떨어지는 설명입니다. 당시 NFT시장의 존재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NFT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NFT아트를 수년 전부터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절묘하게 어울리는 제목이 되었습니다. 우연이라 해도 여러 모로 뛰어난 센스를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무엇이 원본인가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원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가 수년 동안 작업해 온 실물 작품들에는 각각의 제목과 번호가 매겨져 있을 뿐 아니라 작가의 도장, 사인, 워터마크 등 원본을 증명하는 장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퍼포먼스를 통해 원본이라고 인증된 실물이 불태워지고 NFT만 남게 됩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도장이 찍힌 실물 작품

데미안은 이에 대해 "물리적 버전을 태워서 이러한 물리적 예술작품을 NFT로 변환하는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둘 다 원본이고 자신은 NFT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앞서 소개한 '거리에서 블록체인으로 - 뱅크시'를 읽으신 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뱅크시의 실물 작품을 소각해 NFT로 전환하면서 가치가 실물 작품에서 NFT로 옮겨갈 것이라고 했었죠? The Currency는 그보다 훨씬 큰 규모와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철저히 기획된 데미안 버전의 아트 쇼이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각자의 몫으로

NFT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NFT의 가치에 대해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우스 우클릭으로 저장해도 되는 디지털 파일을 비싼 돈을 들여 사고파는 것은 그저 돈 욕심에 눈이 먼 투기성 자본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은 확고히 NFT아트의 가치를 지지하면서도 유난을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비교해 보라며 답을 슬쩍 떠넘기고 같이 더 생각해 보자고 합니다. NFT아트가 가진 과도기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할 때마다 생기기 마련인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화려한 퍼포먼스 쇼와 함께 던지며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yBa 초창기 시절 자신의 전시를 직접 기획하며 찰스 사치의 눈에 띈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죠. 200억 원이 넘는 수입은 그저 덤일 뿐입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오늘날에도 NFT아트에 도전하고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현대미술 작가 중 데미안만큼 NFT아트 세계에 부드럽게 연착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말이죠. 사안의 본질을 간파하는 통찰력,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즈니스 감각과 치밀한 기획력, 확신이 생기면 낯선 분야의 리스크마저 정면 돌파해 버리는 과감함까지. 어떤 분야의 일을 했어도 성공했을 것 같은 부러운 능력입니다. 어쨌거나 The Currency는 이처럼 성공한 프로젝트로 일단락되었는데 데미안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엇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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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urrency NFT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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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NFT 컬렉션

   https://opensea.io/collection/empresses

   https://opensea.io/collection/great-expec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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