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인간이 가장 어리석고 부끄러울 수 있는 영역이 사랑이라고 봐. 그 이상으로 우릴 미치게 만드는 걸 감히 상상할 수가 없어. 이번엔 사랑이 자기애를 뛰어넘는 경계를 얘기해 볼게.
내 생각에, 존재는 자기애를 기본으로 살아가는 거 같아. 언제나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아무리 엄격하게 자신을 보려고 해도, 객관이라는 영역에 자신을 놓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때로 그게 머릿속에 잘 정돈되더라도,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란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야(실제로 갑자기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우린 그 속도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마련이란 거지. 그런 감정이란 대부분 자기 위주의 해석일 거고.
웃기는 건, 누군가는 방금 내가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을 번뇌라고 부른다는 거야. 물론 유용한 개념이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닌 것 같아. 난 그걸 존재의 귀여운 부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좀 비겁해 보이더라도, 남보다 많은 간식을 먹고 싶어지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존재를 향하는 사랑은 뭘까? 잔인하게도 난, 이타적인 감성은 이기심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아무리 무한해 보여도, 내가 평생 누군가에게 향할 수 있는 사랑은 분명 한정되어 있어. 사랑이 향하는 경로를 크게 나와 다른 존재라고 나눈다면, 기준점은 ‘나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있느냐’로 수렴할 거야. 평생 사랑에 사용할 수 있는 정신력에서 자신에 대한 애정을 빼고, 남은 부분을 남에게 사용할 거라는 얘기지.
난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이 주장의 모순과 함의를 알 길은 없어. 새롭게 2가지 상상이 떠오르긴 해. ‘사회의 경제적 분배 시스템이란 것이 [잉여]라는 자본의 출현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을까’라던가 ‘유아기의 존재는 [거울 자아]라는 시기를 통해, 비로소 자신과 자신 바깥의 세계를 인지한다는데, 그 시기 이전에는 어떻게 되는 건지’말이야.
후자는 참 재밌네. 자기애 이후에 이타적인 사랑이 있다는 내 주장을 뒤집을 수 있겠어. 이에 대한 내 견해는 이래. 당연히 존재가 태어난 직후에도 사랑을 감지할 수 있을 거야.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와 한기의 존재, 첫 호흡의 고통, 어머니와 끊어진 연결 등은 모두 요동치는 심장이 증언하는 사랑의 형태니까.
내 상상에, 존재는 그 모든 것을 일인칭으로 느끼고 있을 거야.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은 자신이 느낀다는 개념이 아니라, 모두 자신에게 직접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이야. 무슨 말이냐면, 나와 부모가 있는 게 아니라, 나와 부모와 세상은 모두 나라는 말이지. 온 세상이 자기애 덩어리인 거야!
말하다 보니, 이 개념은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내가 가져온 거 같네. 분명 나 혼자 만든 생각은 아니야. 아무튼, 그러다 아이는 자신이(온 세상이 아니라) 조그마한 몸뚱이에 한정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신의 사랑을 구별해서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
슬슬 자기애를 분배하는 법을 이야기할 수 있겠어. 대부분의 존재는 자신을 가장 아끼고 있어. 모두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모두가 자신의 사랑 51% 이상을 자신에게 쏟고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겠지.
누군가가 이타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다는 평판은 그 비율에 따른 것일 수 있어. 자기애 비율이 높은 사람일수록 욕망에 충실하다거나 도덕적 문제가 있다는 평을 받을 수 있을 거고, 자기애 비율이 낮은 사람일수록 좋은 사람이라거나 순진무구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겠지.
때론 누군가의 헌신적인 사랑이 무한해 보일 수 있어. 대표적으로 깨달은 자나 부모의 사랑이 있겠지. 이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율의 기대치 때문일 수 있겠어. 우린 자기애 51%를 마지막 기준점이라 생각하는데, 그들은 이타적인 사랑을 과반수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그 크기가 거대해 보이는 거지.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도 내가 생각한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아까 ‘거울 자아’ 예시에서 봤던 아기처럼, 그들도 ‘자신’의 범위를 늘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부모는 자신의 일부인, 자식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게 돼. 깨달은 자는 아기의 그것처럼 세상 모두가 사랑과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억압받는 약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자신의 이유로 헌신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실 자기애의 거대한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우리가 그들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진짜 이유는 그런 곳에서 오는 게 아닐까?
우린 흔히 배우자에게 나의 반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거 같아. 정말 적절한 표현이야.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기준점이니까. 누군가를 나 자신만큼 소중히 여긴다면, 그건 새로운 단계의 사랑이 시작함을 의미하는 거야. 당신은 생각보다 쉽게 누군가를 40 정도 사랑할 수 있지만, 그건 헌신적인 사랑을 준비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는 거지.
아쉽게도 난 그런 사랑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 거 같아. 물론 내게 소중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헌신적인 건 한참 멀었어. 난 아직 나 자신부터 챙기기 벅찬 못난이지. 그 이상을 감내할 의지도 의향도 없는 상태 말이야. 관심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곤, 무신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거짓된 행동과 단어를 선택하는 정도 말이야.
이런 내가 말하기 뭐 하지만 누군가와 50 : 50이 되고 49 : 51로 나아가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야. 우리가 사랑으로 멍청해지는 순간은, 나 이외의 것을 나 이상으로 사랑하는, 위대한 경험을 위한 탐구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아직 구원받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을 수 있겠어.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런 사랑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