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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과 진화

by 여러 이상한 헛소리 Mar 23. 2025

  흔히 생명의 진화를 진보와 창조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게 편리한 과정은 아닌 거 같아. 내가 이해한 진화는 완벽한 제로섬 게임에 가깝거든. 한 개체에겐 1이라는 점토가 주어지고, 그 정해진 점토를 어떻게 공작할지 궁리하는 과정이라고 말이야. 아무리 놀라운 변화가 있어도, 없던 점토를 만들어낸 건 절대 아니야.


  이 우주의 질량은 보존되는 법칙을 가지고 있어. 또 에너지 운용에 의해 점점 불규칙하게 재배열되고 있지. 쉽게 말해,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 살아가야 하고, 언젠간 그게 끝날 거라는 거야. 한 생명의 육체에도 이런 법칙이 가장 우선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환경에 맞춰 무언가를 특출하게 갖추면, 무언가 포기하는 부분이 생기고, 그 이상을 가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지지.


  수명을 예로 들어 볼까? 개체의 수명도 배팅할 수 있는 자원의 일종이야. 결국엔 에너지의 문제니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단세포 생물은 사실상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더라고. 자유롭고 무한하게 자기 복제를 해내는 방식으로 말이야. 이걸 바꿔 말하면, 단세포 생물이 복잡한 구조로 나가는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 영생을 잃어버린다는 거야. 이미 세포 단위에서부터 이 제로섬게임이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거지.


  영생을 포기하고, 다세포 생물이 되면서 얻어낸 것은 무엇일까? 그건 더 큰 에너지를 영위하는 방식이야. 육체를 더 복잡하게 만들면, 주변의 에너지를 더 쉽게 끌어들일 수 있을 거야. 무생물에게서 얻는 자원의 범위를 크게 늘릴 수 있을 거고, 단순하게 다른 생물을 섭취하여 많은 에너지를 약탈할 수도 있을 거야.


  이쯤 되면 복잡해진 유전정보를 서로 의존해서 전달하는 방식이 효율적일 거고, 덩달아 훨씬 많은 변이를 유도할 수 있겠지. 이것이 한정된 자원과 자기 복제 의지가 만들어내는 제로섬게임의 기본이야. 더 많은 에너지를 영위할 수 있는 복잡한 육체가 만들어지고, 남들보다 복잡하게 자기 복제할 권리를 얻어낸 대신, 영생과 규칙적인 주변 에너지를 어지럽히는 거야.


  이 과정은 단순히 에너지를 차지하고 빼앗기는 게 아니야.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진화의 갈래지. 개체의 생존을 효율적으로 하고, 빠르게 마모하는 육체의 시련을 감수하지. 다양한 종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거지만, 막대한 에너지를 독차지하는 불합리한 전략이란 없어.


  좋은 예시를 들어 볼게. 페가수스나 유니콘이 상상의 동물인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야. 잘 달리는 육체에 유전적으로 거의 모든 걸 희생한 말이, 새처럼 날개를 달거나 코뿔소 같은 뿔이 난다는 건, 규칙을 어기는 행위가 되는 거야. 날기 위해선 잘 달릴 만큼 무거운 육체를 포기해야 하고, 뿔을 달기 위해선 충분한 칼슘을 확보해야 해. 이런 기능이 향상되면, 잘 달리는 말의 비율을 망가뜨려야 할 거야.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해도, 애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효율이 떨어진다는 거지.


  수명의 얘기로 돌아와도 마찬가지야. 넘치는 에너지를 활용하기 위해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할수록, 기대수명은 빠르게 감소할 거야. 육체의 마모를 가속하는 일이니까. 반대로 신진대사를 낮춰서 느리게 이동하는 존재는 기대수명이 매우 길 수 있겠어. 거북이가 그렇게 장수하는 거겠지?


  이처럼 아무리 막대한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선이 육체에 새겨져 있어. 에너지는 전략을 다양하게 하는 수단일 뿐, 누군가를 승자로 만드는 물건이 아니야. 하지만 승자를 만들면서 발전한, 인간이란 존재도 있지.

 

  이쯤에서 더 머리가 복잡해져. 인간도 생물학적인 제로섬 게임에 벗어나진 않을 거야. 뇌 용량이 큰 만큼, 원숭이보다 생존에 불리한 육체를 가진 거겠지. 때문에 무리를 이루는 것에 뇌를 더 활용해야 했고, 집단사회에 더 많은 공을 들이는 전략을 취했을 거야.


  자연스레 복잡한 의사소통을 개발하게 되고, 그것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 같아. 자신이 영위한 에너지의 과실을 후손에게 축적하면서 전달할 수 있는, 지식과 문화라는 새로운 유전자 말이야. 이것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자세한 건 다음 기회로 미워야겠어. 너무 많은 걸 한 번에 전달할 필요는 없으니까. (애초에 도킨스의 아이디어기도 하고)


  이번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존재와 세상은 결코 불합리하지 않다는 거야. 적어도 유전자의 입장에서 말이야. 분명 세상은 잔혹하지만, 인간의 사회처럼 어딘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거지. 자연엔 폭력이 아니라 거대한 순환이 있다고 보는 거야. 거친 바다는 대부분의 폭력보다 강력할 수 있지만, 그걸 폭력이라고 말할 순 없는 거잖아. 자연에 당하는 피해가 커지고 있다면, 오히려 우리가 자연에 가하는 폭력이 새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동시에 자연 자체가 완전히 순환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야. 아무리 녹음으로 가득한 세계라도, 상당히 더디게 에너지의 해체가 이뤄지고 있는 거지. 그건 우주가 어떤 생명도 만들지 않더라도 진행되는 거야. 생명이 더 많은 단위의 에너지를 영위할 만큼 진화하면, 그 에너지 풀장 안에서의 해체가 그만큼 가속하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면 아마존의 밀림과 인간의 본질은 같아.


  결국 우리는 필멸의 해체자야. 자연의 모두가 그렇고, 우주가 지속되는 한 그럴 거야. 에너지가 한정된 세상은 한정된 존재를 낳기 마련이라는 거지. 난 그게 진리라고 믿어. 우리가 이 정도의 겸손과 경이로운 지식을 파악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멋대로 꿈꾸고 있다는 거야. 이게 세상과 인간에게 가지는 나의 휴머니즘 신앙이야. 새삼 이렇게 글로 써보니, 정말 무시무시한 사상이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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