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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로익 (Laphroaig) 10년

삶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

by 쿠쿠루 Mar 21. 2025

취향이란 것은 돌고 돈다.


몇 년 전 다시 영국에 돌아와서는 프랑스 와인을 잔뜩 마셨다. 대륙 유럽에서 보면 영국도 변두리겠지만, 한국에 비해서는 와인의 접근성이나 가격 모두 훌륭하다. 집 근처 와인샵 세 군데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큰 가게까진 아니지만 결국 보르도 코너에서 더 궁금한 와인이 없어질 즈음 그 동네를 떠나게 되었다.


영국에 갓 도착해서 짐도 덜 푼 채 구입한 와인. 'The English (L'anglais)'라는 이름을 보고 샀다영국에 갓 도착해서 짐도 덜 푼 채 구입한 와인. 'The English (L'anglais)'라는 이름을 보고 샀다


한동안 금주와 자숙의 시간을 가지다가 최근에는 다시 위스키로 돌아왔다. 계속 줄어들질 않아 이사할 때도 짐만 되었던 남은 위스키 병을 하나둘씩 없애다가 요즘엔 다시 술창고를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


이번에는 라프로익 10년을 구입하였다.


주문 후 2시간 만에 받은 라프로익 10년주문 후 2시간 만에 받은 라프로익 10년


라프로익을 처음 접한 것은 한국에 있을 때다. 아주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점차 다 아는 맛, 해 본 것, 가본 곳 같은 것들로 주변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며 세상이 조금 심드렁해져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던 무렵이었다.


주류 가게에서 라프로익 쿼터 캐스크를 팔고 있어 호기심에 구입한 것이 처음이었다.


집에 이미 보모어와 아드벡이 있었기 때문에 피트 위스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라프로익은 그런 게 있다더라고 이름만 들어봤던 때였다.


피트는 이끼, 풀 등이 습지에서 느리게 분해되며 생성된 물질이다 (출처: 영국 지질학회)피트는 이끼, 풀 등이 습지에서 느리게 분해되며 생성된 물질이다 (출처: 영국 지질학회)


큰 기대 없이 집에 와서 병을 따고 한 모금 입에 넣은 순간, 심드렁해져 가고 있던 세상에 한 줄기 환희가 비치며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여태껏 먹어보지 못했던 맛. 새로운 무엇인가다. 피트 위스키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둡고 거친 스코틀랜드 해안의 짠내 머금은 바닷바람이 내 몸을 녹진하게 덮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트위스키가 처음은 아니었음에도 이 정도로 강렬한 맛이라니.


다만 이 멋진 경험이 곧바로 새로운 라프로익 구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면세점에서 지나가다가 휙 사기에는 뭔가 라인업이 복잡했고, 뭔가 좀 좋아 보이는 녀석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뜻 지갑을 열만 한 가격도 아니었다.


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까?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까?


게다가 피트위스키는 사봤자 같이 먹을 사람도 없으니 혼자만의 사치를 위해서 수십만 원짜리 술을 사는 것도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남아 있던 라갸불린 16년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라프로익이 생각났다.


쿼터 캐스크는 이미 먹어 봤으니 가장 기본이라는 10년, 또는 10년 CS(Cask Strength) 중에 조금 고민하다가 아마존 프레시에서 주문하면 두어 시간 내로 받을 수 있고, 가격도 32 파운드 밖에 안 하는 10년을 선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라프로익 10년.


라프로익의 맛이 눈으로 보이는 듯하다라프로익의 맛이 눈으로 보이는 듯하다


위스키 중에서도 라프로익만큼 자기 브랜드의 특성을 분명한 색상으로 정의한 브랜드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피트위스키라고는 하더라도 액체의 색상만으로는 다른 위스키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라프로익은 포장, 병, 병 라벨에 그린과 화이트를 위주로 한 색상을 번갈아 배치하고 전 라인에 걸쳐 일관된 색상을 적용함으로써 라프로익 그린이라고 불러도 좋을 강렬한 색상 정체성을 확보했다.


라프로익과는 달리 제품별로 다채로운 색상을 제시하는 글렌모렌지의 히드로 공항 내부 매장라프로익과는 달리 제품별로 다채로운 색상을 제시하는 글렌모렌지의 히드로 공항 내부 매장


위스키를 뜯기 전에 상자를 살펴보니, 라프로익의 친구들이라는 것이 있었다. 스캔해 보니 회원 가입을 하면 라프로익 증류소 근처의 1 제곱피트(30x30 cm) 짜리 땅을 준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마케팅이 아닐 수 없었다.


부동산 스캠은 아니었다부동산 스캠은 아니었다


웬만하면 경품은 귀찮아서 건너뛰는 타입이지만 땅욕심(?) + 호기심의 조합은 강력했다. 회원 가입을 하고, 병 라벨에 붙어 있는 고유 번호를 입력하면 된다. 다만 폰으로 진행한 탓인지 절차가 꽤 번거롭고 인터페이스도 다소 불편해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 나에게도 작은 땅문서가 생겼다. 구글맵에서 위도와 경도를 입력하면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아일라 섬에 위치한 나의 작은 땅을 확인할 수 있다. 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브랜드와 소비자 간의 연계성을 생성하는 방식이 스마트하고, 또 재미있게 느껴졌다. 스코틀랜드 서해안 아일라 섬 어딘가에 나의 작은 땅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라프로익이 또 생각날 테니 말이다.



이곳은 쿠쿠루의 땅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어라, 리스잖아?)이곳은 쿠쿠루의 땅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어라, 리스잖아?)


비트겐슈타인의 무덤 때와 마찬가지로 내친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검색해 보니 피트 위스키로 유명한 라프로익, 아드벡, 라갸불린이 모두 지근거리에 있어 일단 가기만 하면 세 군데 다 가볼 수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로 느껴졌다. 그러나 런던 기준 차로 12시간.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글라스고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더라도, 글라스고에서 페리를 포함해 차로 5시간 반이 걸리는 것을 보고 일단 당장은 마음을 접어야 했다.


나중에 그래도 한 번 가보고 싶다 (출처: 라프로익 홈페이지)나중에 그래도 한 번 가보고 싶다 (출처: 라프로익 홈페이지)


그래서 라프로익 10년에 대한 평가는. 우선 피트향이 익숙해서인지 피트향 자체는 비교적 미미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입 안 가득 퍼지는 바닷물의 짠내음과 어두운 녹색빛 이끼로 덮인 스코틀랜드 해안가의 쫍쪼름한 바다흙 맛이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스코틀랜드 바다흙을 직접 파먹어 봤는지는 묻지 말아 주세요).


입에 조금 머금고 있으면 짙은 바다 내음과 함께 불에 탄 나무향을 느낄 수 있었다. 쿼터캐스크를 처음 접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때 어떤 감각을 느꼈었는지 기억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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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도착한 롤랑 바르트의 신화학 책과 함께 허세샷


삶의 여러 측면 중 하나는 삶이 경험의 총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경험을 찾고 싶다면 'Love it or Hate it'이라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라프로익과의 만남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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