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전환, 기회.
그는 그 누구보다 바빴다. 새벽에 일어나서 헬스를 하고 아이들 등교를 시키고 출근해서 야근하였고, 퇴근 후에는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술 한 잔 하지 않고 다시 운동을 하였다. 바쁜 일정 때문에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하여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자기 관리도 철저하고 건강에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던 그에게 뇌경색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보통 하루아침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어리둥절해하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병이 왔나, 남보다 더 착하게 살았는데’하며 좌절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자책하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그에게도 내면에는 그러한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병이 찾아온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했던 그는 어느 날인가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신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적은 있었어요. 술, 담배도 하지 않았고 꾸준하게 운동하며 음식도 신경 써서 먹어서 나름 건강 관리를 잘했다고 자부했었는데, 이러한 병이 내게 왔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죠.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이었겠죠.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어요. 건강관리를 이렇게나 잘했는데도 오는 병이라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병이 어쩌다 내게 온 것이고 믿을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죠.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나마도 다행인 건, 평소와 다르게 제가 차에서 잠든 걸 이상하다고 느낀 직원분이 바로 응급실로 데려가서 조치를 취했다는 거예요. 빠르게 대처해서 증상이 경미하게 왔다고 의사가 말하더군요. 참 감사한 일이죠. 그리고 또 감사한 일은, 아이러니하게 이 병 덕분에 얻은 것도 있어요. 이제는 조금 휴식을 취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에는 그 모든 일을 내가 다 해야 했고. 다른 분들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하나하나 내가 다 했었어요. 그래서 쉬지도 못했고, 휴가를 가도 일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병이 온 이후, 쉬는 시간을 가지며 생각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생각보다 모두들 일을 잘하더라고요. 예전에 생각지 못했던 다른 직원들의 역량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물론 그들에게 보완할 점은 있어요. 하지만 그 나름대로 일을 잘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조언이나 도움을 줄 수 있겠죠. 제 역할이 그것인 거죠. 저는 이제 더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각자 각자의 역할을 주고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함께 오래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가족들의 건강도, 지인들의 건강도 더 챙겨야 하겠고요. 제 자식들은 나중에 제가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긴 했었는데, 이제는 말리고 싶어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더 좋은 일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직업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어요. 저 또한 몇 년 후에는 은퇴하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할 생각입니다."
이 분은 10여 년 전에 만나 뵈었던 환자분이었는데, 이름이며 얼굴이며 심지어 목소리, 말하는 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생각이 정말 멋진 분이어서 잊히지 않는 분이다.
사실 내가 대하는 환자분들 중 이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분은 드물다. 젊으시고, 병전의 직업으로 돌아가서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는 분이셨기 때문에 언어치료를 원하셨지만, 연세가 있으시고 직업복귀를 하지 않으시는 어르신들은 잘 걷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언어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분들도 있다. 물론, 요즘 들어 인식이 많이 바뀌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게 언어라고 생각하여 치료받겠다는 할머님들이 많아지기는 하였다. 여하튼, 이분은 일상생활에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이 막히기도 하여,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나 또한 언어치료 준비를 할 때에도 최신의 뉴스를 발췌해서 듣고, 읽고, 그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또 본인의 직업에서 사용하는 단어들-경제 용어가 주여서 내가 많이 배웠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어진 단어들에 연상되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설명하는 과제들을 주로 하였다. 그분의 머릿속에 단어의 이미지와 의미는 있었지만, 그 단어의 발음이 생각이 안 나서 힘들었다고 하시는 분이었다. 가령 그 단어가 절에 매달려있는 ‘풍경’이었다 치면, 절에 있는 ‘풍경’의 영상과 분위기, 사용처 등등은 다 떠오르는데, /풍경/이라는 발음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말에서 /풍경/이라고 부르기로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약속하였고, 나는 그 단어를 익히고 배워 내 머릿속 사전에는 /풍경/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 사전에서 꺼내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단어가 몇 개 있었는데 상황마다 떠오르다가 없어졌다가를 반복하였다.
다시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때의 나도 많은 부분을 생각해 보았다. 사람마다의 장점이 있고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 , 일처리가 그리 뛰어나지 않은 나도 내가 다 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막상 일을 진행하다 보면,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뛰어나게 일처리를 진행하는데 말이다. 나보다 경력이 적은 사람들에게 일이 어렵거나 일처리 속도가 늦는 것은 처음이라서 그랬을 텐데, 그 처음이라는 기회를 주지 않거나, 나중에 시간이 너무나 흐르고 난 뒤에 주는 것도 문제이다.
그 이후로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이 있었다. 본인이 병전에 아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싶었는데, 아들이 줄곧 거부해오다가, 병 이후로 아들의 마음이 바뀌어서 사업체를 잘 운영한다는 분도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일처리를 잘해서 마음이 놓인다고. 그럴 줄은 몰랐다고. 어쩌면 이 병이 와서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서, 기회였을 수도 있다는 좋은 생각을 하기로 했다고.
이런 이야기를 다른 많은 환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내 목소리가 아닌 그분들의 목소리로 더 생생하게. 그러나 그분들은 원하지 않았고, 그런 무대가 없기도 하였다. 아쉬웠다. 어떻게든 그분들의 경험담을, 뒤이어 오는 환자분들에게 힘이 나는 목소리로 들려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펼쳐낼 수 있을지 고민이다. 유명인사는 아니어도, 값진 경험담을 풀어줄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생겼으면 좋겠다. 언제 누구든 장애가 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피해왔던 말이었지만, 내 가족에게 불운이 찾아올 수도 있고 내게 어떤 병이 올 수도 있다. 성공하지 않았어도, 매일같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소소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내 직업은 늘 배움의 길이다. 인생의 교훈을 배우는 일도 많고, 매번 환자를 만날 때마다 책이나 논문을 들춰보며 노력해야 하기에, 나는 내 일이 좋다.
오늘도 환자를 만나면서 인생의 교훈과 환자의 치료법에 대해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