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이와 각자 자유시간을 갖기로 한 오늘, 나는 엘아테네오 서점과 레콜레타 묘지, 국립미술관에 다녀올 예정이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다 못해 해가 어찌나 강한지... 눈을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선글라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뚫고 들어오는 햇살... 한여름 유럽여행 시 느낄 수 있었던 그 햇빛.
서울의 흐린 햇살에 익숙한 나는 이런 가감 없이 내리쬐는 햇살에는 한없이 약하다. 일상에서는 늘 그립고, 막상 닥치면 힘들어한다. 역시 사람은(나는) 추억을 미화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햇살을 견디며 도착한 리콜레타 묘지. 아르헨티나인들의 사랑. 에비타가 잠들어있다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동묘지라는 이곳은, 사실 '묘지'라는 인상 때문에 아주 약간은 께름칙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밝은 편이었고, 묘지라는 느낌보다 조각품 전시회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다양하고 화려했다. 유골이 모셔진 건축물 하나하나는 개성이 있었고, 내부는 후손들이 놓고 갔을 듯한 조각품이나 장난감, 꽃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르헨티나 역사 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람들이 묻혀있을 텐데... 까막눈이인 데다 이곳 역사를 모르는 나는 지나치듯 구경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에비타는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고, 나는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외울 정도로 봤기 때문에, 그의 묘지를 찾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역시나 그녀의 묘지 앞에는 가장 신선한 꽃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도 많이 찾는 것 같았다.
죽은 이를 기억하며 기리는 것은, 어느 문화에서나 방법만 다르지, 뜻과 의미는 모두 같은 듯하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
묘인가 조각작품인가
에비타의 묘
현재 아르헨티나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심각한 경제 상황을 봤을 때, 이렇게 화려한 묘지는, 과거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슬픈 유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은 관광객인 내가 보아도 섬뜩할 정도다. 우리 숙소 옆에 햄버거 가게가 하나 있는데, 불과 10개월 전에 1000페소이던 버거가 지금 4000페소에 육박하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 먹는 것, 생필품, 대중교통비 등이 단기간에 갑자기 3~5배씩 오르면, 생계에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서민들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국가의 적극적인 구제 정책 없이 거리에 내몰린 서민들은 곧 부랑자가 되겠지. 어린아이를 데리고 동냥하며 앉아있는 그이들이 참 안쓰러워 보였다.)
아르헨티나를 사랑하며 짧은 생이었지만 국민을 위해 일하다 생을 마감했다는 에비타의 마음처럼, 아르헨티나가 어서 정상적인 정치, 경제 상황을 회복하길 바라본다.
리콜레타에서 땡볕에 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얼른얼른 이동하기로 한다. 미술관에 가서 쉬며 작품들을 좀 감상하다가 카페에 가서 일기도 쓰고~ 여유를 부리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쨍하게 맑은 하늘
국립미술관
엄청 맛있었던 브런치 메뉴! 과일에 목말라있었기에 보자마자 시킴!
엄청 핫한 아버님의 아이들 하교 픽업! 넘 보기 좋아서 도촬~!
온이는 오늘 마트구경을 간다고 했었는데, 나가서 양상추를 사다가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양념장으로 양상추김치를 만들고, 나 몰래 가져와 가방 구석에서 우리의 여행을 모두 함께한 미역으로 미역국을 끓여놓았다. 며칠 뒤 내 생일이라 이런 깜찍한 이벤트를 준비한 온이. 왕 감동!! 역시... 마음이 참 따수운 우리 온이...
(사실 어제부터 뭔가 할 거 같은 스멜을 풍겨서 좀 의심하고 있긴 했지만 ㅋㅋㅋ 미역국은 진짜 생각 못했당~~)
진짜 너무 맛있어서 게눈 감추듯 밥, 미역국, 양상추김치를 해치웠는데 진짜 속 편한 배부름!! 이것이 식사다! 한국인은 밥과 국!!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먹은 듯!!
(양상추로 김치를 만든다는 발상을 하다니... ㅋㅋㅋ 생각보다 맛있다는...)
아르헨티나에서 미역국 컵에 담아먹기~~ (Feat. 양상추김치)
나이가 한 살 더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삶의 내적, 외적, 경제적 모든 부분에서 스스로를 다져나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든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인생 안에서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산다는 것은 사실, 나를 알고 받아들이는 길을 걷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것, 못하는 것. 내 잘난 점, 못난 점. 모두를 알아나가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찾아나가기로 한다.
어제보다 좀 더 멋지게, 좀 더 나답게.
앞으로 올 수십 년의 삶도... 또다시 울고 웃을 일 투성이일 나의 삶도... 그 나이대에 맞는 유연함으로 대처하며 살아가길. (그리고 가능하면 울 일은 쪼끔만 찾아오길....)
이번 여행 내내 쉴 때마다 나와 함께했던 내 인생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어느덧 마지막 회이다.
마지막 회의 하이라이트... 이병헌(동석)/김혜자(옥동)의 된장찌개 씬...
온이도 같이 보았는데...ㅋㅋㅋㅋ
둘이서 훌쩍거리며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면서 봤다. ㅋㅋㅋㅋㅋㅋ 휴지에 코 풀며.. ㅋㅋㅋㅋ 아 웃겨~~
이놈의 연기자들이 연기를 왜 이렇게 잘하냐며 실컷 울며, 서로의 꼴을 보고 웃으며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내주었다. ㅋㅋㅋ
드라마도 우리의 여행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여행이 끝난다고 울지는 못하는 나에게 이렇게 울 수 있는 기회를 주다니~! 고오맙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