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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숲 Oct 20. 2022

1 데시벨 라이프

날이 밝기 전 눈만 뜨고 뒤척이고 있으면 강아지와 고양이도 눈만 뜬 채 가만히 내가 일어나길 기다린다. 마당의 조명이 꺼지고 희미하게 날이 밝아올 즈음 몸을 일으키면 그제야 아이들도 따라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곧이어 콜라는 볼 일을 보러 나가겠다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고래는 창가에 올라가서 내가 창문을 열어주길 기다린다. 나는 버릇처럼 창과 문을 열어주고 커피를 내린다. 이 작은 방에서 내가 없다면 아이들은 문도 창도 못 열고 지내야 할 텐데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 사람이 줘야만 밥을 먹을 수 있고, 사람이 문을 열어줘야만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아이들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사람이라서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문도 창도 열 수 있고,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밥도 먹을 수 있는데, 그래서 다행인 걸까. 그렇다면 과연 이 지구에서 인간의 삶이 가장 위대한 삶일까.


오늘 아침은 조금 추워서 창가에 라디에이터를 틀었더니 오슬로가 다가와 그 앞에 앉았다. 고양이 오슬로는 우리 집에서 제일 따뜻한 곳을 제일 먼저 차지하는 아이다. 차 소리도 공사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방에 그르릉 거리는 오슬로의 소리만 윤슬처럼 아른거렸다. 

큰 소리가 사라지면 비로소 들리는 작은 소리들이 있다. 도시에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많은 소음들 때문에 묻혔던 그 작은 소리들이 모든 소음이 사라지면 그제야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 낙엽이 구르는 소리, 새소리,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들이 많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들을 어딘가 멀리 가야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들은 말없이 조용히 있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만큼 우린 나 자신을, 그리고 내 주변을 조용하게 만드는 걸 어려워한다.


우리 넷의 작은 방은 오늘 아침도 아무 말 없이 고요하다. 문득 언젠가 서울에서 내가 다니던 회사 앞에 빌딩을 세우는 공사가 시작돼서 근무 시간 내내 공사 소음에 시달리던 시절이 생각났다. 결국 견디기 힘들어서 소음 관련한 민원을 신청했는데 그때 담당자가 소음측정기를 들고 우리 사무실에 왔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과연 침묵 같이 적막한 지금 나의 방은 실제로 얼마나 조용한 걸까 궁금해서 소음도를 측정해 보았다. 스마트폰 애플리캐이션의 바늘이 0에서 1 사이에서 떨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이 넷이나 있는데도 1 데시벨 밖에 안 되는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과 개와 고양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서로의 언어를 모르고 눈빛만으로 소통해야 하니까, 사실 우리는 소리 내어 말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다. 나는 1 데시벨에서 멈춘 바늘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서울을 탈출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시끄러움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인데, 이제는 1 데시벨 라이프를 살고 있으니 나름 서울 탈출이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침 햇살이 방 안 깊이 들어오고 새들이 몇 개 안 남은 때죽나무 열매를 먹으러 올 시간이다. 창밖의 나무를 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고래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나 고요한 우리 집에도 가끔은 이렇게 쿡쿡 웃는 소리가 현관문에 우편물 떨어지는 소리처럼 짧게 들리기도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 중에 작은 웃음소리 하나 슬쩍 끼워 넣는 것만으로 우리에겐 그럴듯한 하루가 시작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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