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이숲 Oct 30. 2022

볕뉘

일본 애니를 보면 흔들리는 나뭇잎 아래에서 반짝이는 빛을 표현한 장면들이 많은데, 일본어에서는 이런 순간을 코모레비(木漏れ日)라고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한국어로는 그런 단어가 없는 건가, 아니면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건가 해서 찾아보니 한국어에서 가장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로는 '볕뉘'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다. 나는 몰랐던 단어지만 사람들은 왜 이 단어를 많이 사용 안 하는 건지 궁금했다.


한가한 국도가 포도밭 사이에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골 분교와 길가에 세워진 경운기 한 대를 지나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불두화와 작약이 활짝 핀 담 너머에는 커다란 넝쿨 장미 두 그루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풀밭을 덮은 이불 같은 공기가 달았다.


“달다! 공기가 달아요!”


동행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꽃향기 때문인지 싱그럽고 커다란 나무들 때문인지 단맛이 느껴지는 공기가 신기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출발 전에 접한 선배의 수술 소식에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다. 그 형은 정말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 대동맥 파열로 수술 중이라니. 나는 왜 착한 사람들이 유독 힘들게 살고, 병에 잘 걸리고, 빨리 이 별을 떠나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왜 착한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는 걸까.


사람들은 말한다. 몇 살이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월급 많이 받는 회사에 취직해야 한다고. 빨리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내 자식이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면 안 되니 남들 하는 만큼은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고. 교육을 위해 빚을 내서라도 대치동으로 이사 가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승진해서 연봉을 올려야 한다고. 그러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그렇기 때문에 밤늦은 술자리도 담배도 굴욕도 사람 관계의 스트레스도 모두 감당해야 한다고. 혹시라도 내가 병들어 처자식이 고생하면 안 되니까 만일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야 한다고. 그러려면 연봉이 또 더 필요하다고. 그러려면 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스트레스도 견뎌내겠다고.


그렇게 많은 날을 지내며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하고, 가고 싶은 데도 가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도 못 보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서 말기 암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아내에게는 암보험을 들어 놓았으니 병원비 부담은 적다고, 안심하라고 말하고, 생명 보험을 들어놓았으니 내가 없어도 남은 가족이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병원 창만 바라보다 덜컥 세상을 떠나면, 그 삶은 성공한 삶일까. 많은 사람들이 걸으라는 길로 걷고 이탈하지 않았으며 하라는 대로 다 하며 살았으니 여한이 없어야 할까.

자기 자식은 돈과 권력이 모인 무리에 끼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 빚을 내서 특정 동네에 집을 구하고, 그 돈을 메꾸기 위해 또 빚을 내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과도하게 일하고, 그러다 병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돼서 더 많은 보험에 가입하고 또 그 보험비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더욱더 자기 자신을 혹사시킨다. 그렇게 집을 모시고 살면서 집값이 오르기만 바라는 이런 삶을 많은 이들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집'이란 한 글자는 정말 아름다운 단어 아닌가. 그런데 그 집이 언젠가부터 '주식'과 같은 단어로 변해버렸다. 집이 주식 같으니 집 때문에 매일 안절부절못한다. 주식 같은 집이 아닌 사람을 위한 집에 살 순 없을까. 사람을 위한 집에 살면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한 오늘의 스트레스 대신 하루하루 볕뉘처럼 빛나는 일상의 행복을 누리지 않을까. 노란 학원 버스를 타고 늦은 밤거리를 다니는 대신 산과 강과 들판에서 뛰놀며 자라면 훗날 다른 사람을 밟으며 뾰족하고 높은 데로만 올라가려 하지 않고 보다 넓은 곳을 바라보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병원비를 대비해 비싼 보험금을 마련하느라 원치 않는 일을 하는 대신 지금 공기 좋은 곳에서 건강하게 먹고 활동하며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면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하지 않을까.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삶을 선택해서 살면서 그 병을 대비한 보험을 들고, 그 돈을 마련한다고 또 스스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활을 선택하는지 알 수가 없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금전적인 대비를 하는 것보다 병에 걸리지 않는 삶을 살며 병원에 갈 일이 없는 게 더 좋은 일 아닐까.


술실에 들어간 형은 장남으로 태어나 결혼과 아들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 그렇게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위해 그 형은 자신의 꿈을 접었고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 행복하지 않은 동네에서 살았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바쁜 게 좋은 거지’라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그 형은 병원에서 큰 수술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형은 보험을 들어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생명보험도 들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묻고 싶다. 그러면 된 건가. 보험으로 병원비가 마련되고 혹시라도 수술이 실패해도 남은 가족의 생활만 어려워지지 않으면, 그러면 된 건가. 그러면, 정말 된 건가. 그래서 죽을 수 있는 큰 수술을 해도 서로 얼굴 마주하며 안심할 건가.


집 때문에 빚을 얻고 그 빚을 다 갚을 때 즈음에는 그 빚을 갚을 때까지 밤낮없이 일만 해서 생긴 병으로 또 막대한 병원비를 내야 하고 그로 인해 또 빚을 얻어야 하는 현대인. 하지만 그 집조차 사람에게 해로운 각종 재료로 허술하게 지은 아파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연 짧은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나는 오래전부터 의문을 가졌다.

나는, 노후를 위해 젊을 때 죽도록 일해서 돈을 모아야 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에게 노후란 과연 몇 년 정도의 시간을 의미할까? 그래 봐야 몇 년 안 될 그 시간을 위해 아름다운 청춘을 스트레스 속에서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과연 기쁜가. 직장 생활을 하고 은퇴를 하고 그간 모은 돈으로 전원주택을 하나 지어 시골에 내려갈 때 즈음 덜컥 암 진단이 떨어진다면, 그 병은 왜 생긴 것일까. 모든 역경을 딛고 결국 죽기 전에 원하는 돈을 만지게 된다면 눈을 감는 순간은 행복할까.

돈을 벌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결국 그 돈을 이용해서 편하게 살고 싶기 때문 아닌가. 게다가 그 돈으로 하려는 것이 적게 일하고 건강하게 사는 전원생활이라면 그건 돈으로 살 필요가 없다. 지금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롭고 건강하게 사는 거 아닌가. 나는 부동산이라는 단어가 싫다. 집이라는 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에게 집은 재산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서울을 탈출해서 십 년 넘게 시골 유랑을 하고 있는 내게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나도 은퇴하면 전원생활을 하는 게 꿈이에요." "그 동네는 어때요? 마트나 병원은 가까운가요? 학교는 어떤가요?" "나도 60이 넘으면 사업 그만두고 시골에서 텃밭 가꾸며 살고 싶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이렇게 되묻는다. "그렇게 시골에 살고 싶으면 지금 오시면 되지 않나요?" 생각해보자, 당신이 65세쯤 돼서 은퇴하고 시골에 땅을 찾고 집을 구하거나 짓고 내려간다면 그때부터 꿈같은 생활이 펼쳐질까. 사람에게 노화 정도는 도시에 있으나 시골에 있으나 똑같다. 나이 들면 똑같이 근력이 모자라고 병원에도 자주 가기 마련이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에 힘도 없는데 텃밭을 가꾼다니. 어차피 병원에 갈 거라면 도시에 있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만일 시골에 내려왔는데 집 보다 병원에 있는 날이 많고 마당보다 방안에 누워있는 날이 많다면 도시를 떠난 의미가 뭐가 있을까. 무엇이든 즐기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그러니까 바로 지금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날은 내가 서울을 탈출한 후 아마도 네 번째 집을 찾던 중이었던 것 같다. 집을 보러 간 마을은 처음 가 본 곳이었지만 공기가 달았다. 조용한 시골, 내가 찾은 어떤 집에는 커다란 호두나무 네 그루와 밤나무, 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집 앞에는 아주 큰 나무 하나에 연분홍 꽃이 가득 달려 있었다.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 저 나무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오동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아! 오동나무가 저런 꽃을 피우는구나. 아까부터 어린 새소리가 들리더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이렇게 덧붙였다. “오동나무는 나무가 연해서 딱따구리가 집을 잘 만들어요,” 아기 딱따구리의 귀여운 새소리가 오동나무에 뚫린 구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뭇잎에 맺힌 햇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여기 없었다면 절대로 보지 못했을 아름다운 볕뉘였다.


그날 나는 두 개의 집을 보았다. 사람의 집과 새의 집. 두 채가 모두 있어야 할 곳에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집과 새의 집 사이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볕뉘를 잊을 수 없다. 돌아오고 며칠 후 나는 내 방 깊숙이 들어온 볕뉘를 보았다. 콜라와 오슬로의 털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이사할 집으로 볕뉘가 예쁘게 맺히는 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 03화 삶의 속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