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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숲 Oct 30. 2022

연못이 얼어도 괜찮아

나의 작은 시골집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예쁜 금붕어가 네 마리 있는데 전 집주인은 내게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연못이 아주 오래돼서 연못 안에 생태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금붕어들의 먹이는 항상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못 옆에 앉아서 가만히 보니 그 작은 연못 안에 금붕어 말고도 새우처럼 생긴 아이와 고동 같은 것들이 많이 보였다. 하나의 다른 우주를 엿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금붕어들이 이미 오랫동안 이 연못에서 살았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추우면 연못이 얼 텐데 어떻게 사는 거지. 그러나 금붕어들은 연못이 얼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수면은 얼지만 금붕어는 얼음 밑에서 살아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이다. 나는 금붕어가 죽지 않는다는 게 기뻤지만 실은 더 좋았던 건 사시사철 금붕어 먹이를 주기 위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뒤뜰에 있는 호두나무처럼 그냥 바라만 보면 되는 것이다. 


한동안 뒷마당에 나가지 않았다. 작년에는 세 번 잔디를 깎았을 뿐 정원을 돌보거나 텃밭을 가꾸지도 않았다. 평상시 나는 의자에 깊이 앉아 네모난 창 속에서 매일 변화하는 풍경을 감상하는 걸 좋아한다. 나는 시골에 살지만 텃밭을 가꾸지 않는다. 텃밭을 가꿀 공간도 충분하고 잘 조성된 정원도 있지만 이미 자생하는 것들 외에는 채소를 기르거나 꽃을 심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자라는 채소를 먹고 나무와 꽃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도시보다 분명히 시골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도시 탈출을 한 이유가 농작물을 키워 먹기 위해서라거나 꽃밭을 가꾸는 내 모습에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시의 피곤함과 소음에 질려서 떠난 것이다. 난 그저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방해받지 않고 사색하고 글을 쓰며 하루하루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물론 모든 시골이 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건 아니다. 시골 원주민들은 의외로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농작물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도시를 떠난 후에도 고요한 시간을 방해하는 마을을 피해 유랑을 계속해야 했다. 한 때는 나도 텃밭을 가꾸고 정원에 꽃이나 나무를 심으며 지낸 적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삿날 별도의 1.5톤 트럭에 가득 채운 꽃화분들을 옮긴 후 나는 결심했다. 나는 그해 겨울 동안 꽃나무들이 살아있도록 별도의 난방을 해가며 겨울을 나야 했다. 그때 나는 날마다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봄이 오고 나는 화분에서 꽃나무들을 모두 뽑았다. 모두 다 노지에 심기로 한 것이다. 봄이 오고 꽃나무들을 땅에 옮겨 심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 스스로 사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텃밭과 정원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분명히 나는 아니다. 많은 도시 사람들이 킨포크 책을 보고 리틀 포레스트 영화를 보며 예쁜 작업복을 입고 근사한 모자를 쓰고 느긋하게 흙을 만지는 시골 살이를 꿈꾼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게 과연 텃밭과 정원인지 아니면 밭에 삼각대를 세우고 왔다 갔다 하며 찍은 자신의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고 싶기 때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골에 오면서 오전에 책을 읽고 오후에 잠시 텃밭과 정원 일을 하고 느긋하게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하고 싶었던 개인 작업을 하는 한가로운 일상을 상상한다면 안타깝게도 현실은 조금 다르다. 텃밭은 봄부터 가을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할 일이 끝이 없다. 게다가 그 노동강도 또한 작지 않아서 자주 근육통에 시달려야 할 수도 있다. 시골에서의 마당 일은 일의 종류가 다를 뿐 도시에서의 스트레스와 마찬가지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런 피로는 텃밭의 크기가 클수록, 텃밭에 대한 집착이나 수확에 대한 욕심이 클수록 더 크다. 만일 당신이 벌레가 파먹은 잎사귀 하나에도 민감하고 뽑아도 뽑아도 올라오는 잡초 때문에 짜증이 나는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는 극한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들을 막는답시고 텃밭에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낸다. 정원 일도 마찬가지다. 쭉쭉 자라는 나뭇가지들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동글동글 예쁜 나무를 만들겠다며 전정가위를 들고 매일 서성거리거나, 매년 죽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잠깐 예쁜 것을 보겠다고 철마다 일 년생 꽃들을 사다 심는 일도 많은 신경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돈도 상당히 많이 든다. 고작 몇 주 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핀 꽃을 보기 위해 매년 돈을 쓰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다. 언젠가 일 년간 구입한 꽃과 나무에 대한 금액 총액을 합산해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대체 내가 이러려고 서울을 탈출한 건가 싶었다. 그러니까 그런 예쁜 정원을 만들기 위해선 자신의 육체적 피로를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애정과 그를 뒷받침할 경제력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시골로 가려는 이유가 나처럼 조용히 글을 쓰거나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는 것이라면 밭과 정원이 정작 당신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나 사색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언젠가 횡성에 살던 번역가 부부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스트이며 비건 커플인 두 사람의 집은 최소한의 생활 집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텅 빈”집이었다. 심지어 방안에 쓰레기통이 없고 대신 안 쓰는 종이봉투를 활용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놀랐지만 한 편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앞마당을 거닐며 내게 한 말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심지 않아요. 가끔 야생화 꽃씨를 뿌려줄 뿐 땅을 파고 거름을 주며 심고 가꾸고 그러지 않아요.” 그들이 씨를 뿌린 야생화는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자라나지만 잘 정비된 공원보다 훨씬 예뻤다. 그들은 자라지 않는 나머지는 그냥 그렇구나 한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었다. 도시에서 하루에 백 통의 이메일을 회신하고 밤 10시 전에 퇴근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나는, 나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은 쓰지도 않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이기도 하고, 듣기 싫어도 들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지만 키 큰 나무들이 있는 숲 속에서 장기 투숙객처럼 가만히 머물고 싶은 것이지, 시골에 큰 집을 짓겠다고 지나치게 큰 땅을 사고 나무를 베고 손이 많이 가는 정원과 텃밭을 부러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내가 스스로 또 나를 방해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안될 일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헤세의 책 제목처럼 정원 일의 즐거움을 꿈꾼다. 그러나 헤세처럼 정원에서 사색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정원을 가꾸는 것도 아파트 인테리어를 하듯 남들보다 크게 남들보다 더 화려하게, 더 예쁘게 만들기 위해 매일매일 전투적으로 산다. 그건 장소만 도시에서 시골로 옮겼을 뿐 어쨌든 일에 찌든 피곤한 일상 아닐까. 나는 아직 내 손으로 내 집을 짓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집에 대한 설계는 도면처럼 명확하게 내 머릿속에 있다. 필요한 소재와 쓰지 않을 것들의 리스트도 분명히 있고 집 관리라는 소모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견고한 건축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다. 집이 있어야 하는 장소나 크기로 볼 때 내가 바라는 최적의 집의 형태는 소로우의 집이 가장 비슷하다. 단지 나는 나무 오두막이 아니라 콘크리트를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을 뿐, 집이 있어야 할 곳이나 크기는 비슷하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살기에 충분한 최소한의 작은 집을 사람의 손이 훼손하지 않은 자연 속에 가만히 내려놓은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집의 모습이다. 인간이 만든 어떤 공원이나 정원도 긴 시간 스스로 형성된 숲 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나는 그런 숲에 안겨있고 싶지 그런 곳을 변형하고 끝없이 가꾸는데 남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고 싶지 않다.


이전에 전세로 살던 집의 집주인은 바로 이웃에 살았다. 그런데 그분은 나만 보면 정원의 나무들을 가지치기하는 법을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바람대로 가지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은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길게 자란 나뭇가지를 왜 보기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그대로 두면 그 나뭇가지가 인간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이토록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다. 나는 나를 방해하는 일을 사서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자신을 방해하는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즐거운 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에게는 즐거움이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이 시골에서 정원과 텃밭을 가꾸다 허리 통증이 오고 쉬는 시간도 하나 없는 나날을 보낼지라도 그 일이 좋아서 즐겁다면 그렇게 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는데 남는 여유 시간에 정원과 텃밭을 돌보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시간에 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말하고 싶다. 정원 나무에 전정 작업을 하지 않는 나를 어쩌면 누군가는 그저 게으른 사람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숨 쉬고 깊이 사색하는 걸 좋아한다. 우리가 만일 숲 속에서 조용히 생활한다면 관찰과 사색이야 말로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하루에 몇 분이나 사색을 하고 있을까.


나는 나의 마지막 집을 짓게 되면 텃밭은 물론 잔디도 심지 않고 철마다 손이 가는 정원도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정원을 만들지 않아도 그대로 항상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 그대로 아름답고 조용한 곳에 가만히 집을 내려놓으면 되니까. 만일 아주 작은 정원이나 텃밭을 조성한다 해도 처음에 만든 모습 그대로 십 년 이 십 년 계절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도록 만들어 놓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이 실은 안 해도 되는 일이고,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실은 필요 없는 것들이며, 연락이 끊길까 봐 조바심 내는 많은 전화번호가 실은 없어도 된다는 걸 깨닫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않고,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물건을 버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십 분의 일로 줄여보면 안다. 당장 휴대폰을 서랍에 넣고 일주일을 살아도 내 삶에 아무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가 도시에 있든 시골에 있든 얼마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안고 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나를 방해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를 위한 시간을 충분히 내주면 그때 그동안 안보이던 야생화 한 송이를 발견할 것이다.


첫눈 오는 날 강아지 콜라가 연못으로 다가가 금붕어들을 보고 있었다. 마치 이제 연못이 얼면 너희는 어쩌지 걱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붕어가 얼어 죽지 않는다는 걸 아는 나는 콜라 곁에서 꽁꽁 얼어붙은 연못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봄이 오면 또 만날 거야." 콜라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지 눈 덮인 마당을 깡충깡충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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