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초가을의 어느 날, 서늘한 날씨
뚝섬으로 이사 온 지 5개월이 지났다. 반년 남짓한 나는 성수에서 살짝 벗어난 이 섬 같은 동네에 홀딱 반해버렸다. 힙합 음악이 나오는 카페 옆 기사 식당이 자리한 곳. 골목골목을 기웃대며 정독하고 싶은 매력이 뚝뚝 묻어나는 곳. 그리하여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성수에서 뚝섬으로, 뚝섬에서 성수로 출근하면서 나는 늘 사람으로 북적이는 이곳이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조용하게 분주한 음식점들과 가게들 사이를 걷다 보면, 문득 결연해 지고는 했다. 나도 무엇인가를 시작해 봐야지. 홍수가 날 때마다 물길이 보였다는 뚝섬을 걷고 또 걸으며 터져 나오는 생각의 홍수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어느 날, 나의 내면을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엇인가를 써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일기에 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카피라이터로서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첫 번째. 현명한 소비 생활에 대한 염원이 두 번째. 글을 잘 쓰는 것과 돈을 잘 쓰는 것의 연관 관계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가 두 가지에 모두 진심인 것은 분명하다. 굳이 두 가지 쓰는 생활의 상관관계를 따지자면 이렇다. 카피라이터로서의 소양을 (물질적) 경험을 통해서 넓힌다.(하지만 내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LP 바 안 가고 멜론 TOP 100만 듣고도 잘 쓰는 사람은 잘 써.”) 탄탄한 취향을 바탕으로 더 나은 창작물을 내놓는 직업으로서 높은 안목도 필요하다. (사실 실무에서 더 필요한 건 취향보다 시키는 일을 잘 받아쓰기하는 능력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에 가까이 다가간 줄은 모르겠으나 돈을 잘 쓰는 사람의 길에서는 착실히 멀어져 왔다. 엄마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아빠를 닮아서 그래. 돈 쓰는 유전자가 있어서 잘 조절해야 돼.”
다시 물으면 엄마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며 발뺌할 것이다. 엄마가 짐짓 진지한 표정이 되어 지나가듯 했던 말은 판박이 스티커처럼 내 마음에 착하고 붙어있다. 그렇다면 왜 엄마의 알뜰살뜰함은 물려받지 못한 건지. 나는 결국 아빠의 씀씀이와 엄마의 내재된 불안감을 골고루 물려받아 쓰면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됐다. ‘이렇게 쓰다가 패가망신할 텐데’라고 불안에 떨면서도 카드를 내미는 일을 멈출 줄 모르는 인간. ‘이게 바로 나다’라고 쿨하게 글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통장에 찍힌 숫자는 사람을 커지게도 작아지게도 한다. 월급날에 스치듯이 부풀려진 나의 금전적 자아는 금세 쪼그라들고 만다. 나도 월급을 적게 받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벌길래. 다들 어쩌면 저렇게 옆 나라 여행을 밥 먹듯이 가는지. 해외여행에서 영감을 수집한 영감의 재료들을 프로젝트에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잘 쓰겠다는 자아는 납작해진다. ‘이 정도 투자도 나에게 못하는 내가 과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때마다 괜스레 교보 문고에 들러 ‘무슨 무슨 국가에서 유행하는 것들’ 같은 책들을 사보곤 한다. 덕분에 나는 교보문고 플래티넘 회원이 됐고, 여행에 쓰겠다고 만들어둔 적금 통장은 휴면 회원 계정이 되어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나의 돈 쓰는 유전자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껏 돈을 마음껏 써제껴 본 결과 돈 쓰는 일과 글 쓰는 일의 상관관계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이런 글을 쓰고 앉아있을 게 아니라 가계부를 쓰는 게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껏 돈을 써재끼며 가계부는 못 써도 원했던 글 쓰는 직업에 한 발자국 다가간 사람이 되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한 중고거래 앱의 카피라이터라로 일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벼룩시장이 요즘 돈이 되나?’라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글과 중고거래라니. 두 단어의 조합을 듣는 순간 엄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멀쩡하게 대기업 광고 계열사에 다니던 딸이 벼룩시장에서 글을 쓰게 됐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원하는 일은 가끔 타인의 이해 밖에 존재한다.
가을이 온 탓인지 자꾸만 또 쓰고 싶다. 글도 돈도 쓰고 싶다. 어제는 소설이 오늘은 에세이가 쓰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옆 나라 여행도 다녀오고 사고 싶던 만년필도 하나 장만하고 싶다. 사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글이 쓰고 싶고 돈이 쓰고 싶다. 오늘도 깊은 고민에 빠진다. 과연 나의 쓰는 자아는 어디로 가는가. 잘 쓰는 것이란 무엇인가.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볼 때마다 인생이란 말의 고삐를 놓친 게 아니라 질겅질겅 씹어 먹고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진정한 변화는 나를 인정할 때 시작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미 나라는 사람을 아는 것이 반이다. 나를 아는 것만이 인생의 절반이 아니더라도 반이라고 믿고 싶다. 말의 머리채를 잡고 달리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랩톱을 켜고 앉아서 지금 쓰는 사람. 적은 돈이라도 지금의 나를 위해 잘 쓰는 사람. 글 쓰는 일도 돈 쓰는 일도 한없이 즐거운 걸 보면 내 안 어딘가 두 유전자 모두 내재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집 앞 카페 중 500원 더 저렴한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옆에 두고 앉아 오늘도 나는 뚝섬에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