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여름,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
오늘도 고단한 하루였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으로 살다보면 모든 문장에 힘을 주게 된다. 우리말을 도구로 삼는 직업. 그 말인 즉슨 모두가 원어민인 한국에서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모두의 의견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의 동의어다. 일하는 내내 쏟아지는 의견과 참견을 구분하며 묵묵히 글을 쓰다보면 가끔은 나도 모르게 서러워질 때가 있다. 문득 '내가 왜 이 직업을 택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지난 경력 기술서를 찬찬히 들여다 본다.
나의 경력 기술서의 첫째줄은 대략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빠의 거듭된 사업 실패 끝에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몇 천 km 떨어진 곳에서 ‘먹고 죽을’ 돈도 없는 신세가 됐다. 이 무렵 나에겐 상반된 두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겠다는 생각과 꼭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 그때 나는 죽을 용기가 없어 후자를 선택했다. 외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죽기 살기로 언어를 익혔다.
절실해서 그랬던 것인지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는 한국의 대기업에 속하는 제철소에 통역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여느 제조업 기반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그곳도 매우 폐쇄적인 곳이었다. 나는 첫 직장에 대한 긴장감으로 잔뜩 주눅 들어 있었고 내심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두려웠다.
“슥회석을 꿉어가지고, 이기를 질들이모…우에 모다에 이기가 돌아가는 기라. 모다를 단디 보고 누바가 졸믄 안돼.”
맙소사. 내가 걱정해야 할 건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말이었다. 그들의 강하고도 탄산이 혀 끝에서 터지듯 톡 쏘는 이른바 ‘갱상도’ 억양.. 가끔 현장직 분들은 한국어를 익힌 현지인 통역사 분들이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며 불평을 한다던데. 내가 그 사람들이어도 이해가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사투리가 익숙하지 않은 그분들에게는 이것은 새로운 언어였으리라. 유난히 사투리를 심하게 쓰시는 분들과 대화할 때면 나는 그들에게 한 없는 이해의 눈빛을 보냈다.
이 시기의 나는 모름지기 일이란 오로지 돈을 위한 것이며 재미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의 나는 로봇 청소기처럼 일했다. 먼지가 끝까지 쌓여도 비워낼 줄을 모르고 제자리로 돌아와 출퇴근만을 반복했다. 어딘지 모르게 굽는 일보다 꿉는 일이 자연스러워질 무렵 대학 진학을 위해 나는 첫 직장과 작별했다. 내가 첫 직장에서 얻은 교훈은 단 하나였다. 사람은 원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국문학과에 가야지! 그리고 엄마는 말했다.
굶어 죽으려면 무슨 일을 못해. 너네 아빠 정치 외교학과 나와서 독일어 배우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태어나기 전인데 뭘 알아보셨다는 걸까.)
꽤나 호기롭던 나의 꿈들은 마른빨래가 착착 개켜지듯 성실하게 접혔다. 나의 꿈들이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나의 소비 자아는 무섭게 강화되었다. 멀쩡한 노트북을 중고로 팔고 맥북 에어를 충동 구매하거나 똑같은 노트와 팬을 10개씩 사들이기도 했다.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도 아까운 줄 모르고 입맛이 없단 이유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유복한 집에 귀하게 자란 영애를 표방한 소비 생활이 무르익어 갈수록 나의 다른 쓰는 자아에 대한 고민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인턴 생활에 절여지며 이 세상에 대한 환희보다 환멸이 늘어나던 시절, 나는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아니,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나에게 찾아왔다.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이게 바로 내 일이잖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국문학과에 가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누구에게?) 그 시절의 나는 정말 몰랐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광고대행사를 기웃대던 나는 기획 직무로 두 번째 사회생활을 (남들 기준에서는 첫 번째 직장이겠지만) 시작했다. 회사 생활은 순조로웠다. 능력 있고 멋있는 팀장님에 맛있는 커피와 밥까지. 불만족스러운 것은 딱 하나였다. 바로 내 직무. 기획의 업무 특성상 카피라이터들과 함께 붙어 일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이 너무나 부러웠다.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그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꾸만 문을 벌컥 열고 끼어들고 싶은 충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과감하게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회사를 박차고 나와 카피라이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쓰고 싶지만 이름을 날리기 앞서 나는 상사에게 살을 날리고 싶은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일 회의에 들고 갈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 때면 ‘카피라이터가 아니면 안 되겠어’라고 몸부림치던 시절의 나를 찾아가서 목을 조르고 싶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부잣집 영애로 스스로를 대접하던 시절의 나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려 무인양품에서 물건을 사서 일주일 후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다음 그 물건을 버리던 사람이었다. 나는 나를 잘 몰랐고 남이 좋다는 취향을 바쁘게 따라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글을 직업으로 삼기 시작한 후부터 나는 나라는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법도. 취향을 가꾸는 법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법도. 나는 모두 글을 쓰며 배웠다. 아직도 새로 나온 맥북 프로를 사고 싶은 나지만, 나는 더 이상 윈도우 노트북은 사지 않는 사람이 됐다. 나와 맞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이 긴 경력 기술서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나라는 사람이다. 마음 한 켠에 잊고 있던 경력 기술서를 펼쳐보고 나서야 나는 깨닫는다. 꿈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며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원하는 꿈의 한 줄을 경력 기술서에 추가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