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아직도 여름을 지나는 중, 그래도 조금 덜 더운 날
뚝섬은 강아지의 천국이다. 반려견 친화 음식점과 카페가 많은 덕분에 귀여운 네발 달린 친구들을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비숑, 꼬통드툴레아, 보더 콜리, 그레이 하운드... 다양한 강아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사람은 두발 동물이고 강아지들은 네발 동물이라 그런 걸까. 뭘 해도 사람보다 두 배 더 귀엽고 두 배 더 사랑스럽다. 어쩌다 포메라니안을 마주치는 날이면 본가에 살고 있는 나의 첫 강아지가 생각난다. 깜장콩 세 개를 박아 놓은 듯한 눈과 코에 어딘가 새초롬한 입까지. 누가 뭐래도 가장 귀여운 나의 강아지, 끔방이가 떠오른다.
끔방이를 처음 만난 건 13년 전 인도네시아에서다. 끔방이는 자카르타에 거주하는 한 한인 가정에서 키우던 금실 좋은 포메라니안 부부가 낳은 고명딸이었다. 하지만 오빠들에게 치여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했다. 끔방이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사투리로 ‘꽃’이라는 뜻인데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이름은 달봉이였다. 윤기 나는 갈색털을 가진 끔방이는 한국의 포메라니안과는 조금 다르게 주둥이가 길다. 우리 집에 온 첫날 끔방이는 네 발로 총총총 찹찹찹 소리를 내며 집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방문이 닫힐 때면 끙끙 소리를 내며 방 문을 앞발로 긁어댔다. 나는 나의 첫 네발 달린 털뭉치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샤워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끔방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날은 샤워를 하다 허벅지까지 바퀴벌레가 기어올라온 것도 모르고 끔방이를 바라본 적도 있었다. 나만 바라봐 주는 무해한 눈빛. 끔방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 없이 밝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으로 낳은 나의 자식답게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다.
*주의*
아래 내용은 다소 픽션처럼 보일지라도,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탠 명확한 사실임을 밝힙니다.
끔방이는 늘 바깥세상을 궁금해했다. 나와 나가는 산책과 별개로 묘하게 이 강아지는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동네 마실에 나설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내가 그 당시 살던 곳은 주택이었는데,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끔방이는 탈주를 감행했다. 나는 불안한 예감에 이리저리 살펴보다 끔방이가 없어진 걸 알았고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으려 동네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졌다. 제발 차에 치이거나 나쁜 사람 손에 잡혀간 게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끔방이를 찾지 못하고 집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동네 사람들 표정이 이상했다. 무언갈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답답했던 나는 평소 단골이었던 집 근처 길거리 음식을 파는 상인 분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내게 말했다.
“당신 강아지는 납치되었어요.”
네? 납치요? 누가! 왜! 도대체, 왜! 내 강아지를 납치했다는 말인가. 나는 혼란스러움과 분노의 감정 사이를 롤러코스터 타듯 반복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인도네시아에는 암묵적으로 동네를 지키는(?) 쁘레만이라는 미니 갱 집단이 있는데 이 동네를 관장하는 갱단의 두목이 내 강아지를 납치해 갔다는 것이다. 지금 이게 실화인가? 영화 테이큰이 아니고? 마음속에서 요동 치는 생각을 뒤로한 채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전혀 차분해지지 않았다. 자꾸만 끔방이의 귀여운 눈과 조그만 발 그리고 촉촉한 코가 떠올랐다. 조그만 몸으로 무서운 곳에 갇혀있을지도 모를 끔방이를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났다. 슬픔 뒤로 찾아온 것은 엄청난 분노였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난 네가 누군지도 몰라. 널 찾아낼 것이다. 찾아내서 죽여버릴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다니던 태권도장에서 입던) 태권도복을 찾아내 입었다. 인도네시아 깡패는 한국인의 스피릿으로 꺾는다. 흰띠는 굳이 찾아 매지 않았다. 그리고 집 안에 가장 강력하게 보였던 망치를 왼손에 들고 갱단의 소굴로 찾아갔다. 그들의 은신처는 의외로 험블 한 곳에 있었는데, 그곳은 변기 공장이었다. 한쪽 팔에 타투를 한 갱들이 옹기종이 모여 변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경기 침체로 인해 이들도 투잡을 뛰고 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알바인가? 나는 망치를 변기로 두드리며 말했다.
“네 소중한 변기를 깨 버리기 전에 내가 강아지가 어딨는지 말해.”
“강아지? 무슨 강아지?”
“다 알고 왔다. 허튼수작 마.”
불꽃 튀는 신경전 끝에 그는 한쪽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린 변기 포장 상자를 카리 켰다. 끔방아! 이것아, 언니 소리가 들렸으면 짖기라도 하지. 끔방이는 그 박스 안에 바들바들 떨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끔방이를 껴안고 변기 공장을 나서려고 했다. 그 순간 철문도 못 열게 생긴 비쩍 마른 몸을 가진 두목은 내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오더니 끔방이를 데려가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얼마면 돼? 그는 한국돈으로 8만 원을 불렀고, 나는 내가 내 강아지 찾아가는데 왜 돈을 줘야 하냐며 바락바락 따졌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했고 5만 원 정도도 충분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변기 공장에서 일하고 비쩍 말랐지만, 그래도 이 동네 갱이라는데. 후환이 조금 두려웠던 나는 그의 손에 5만 원을 쥐어주고 나의 강아지를 되찾아 왔다. 공장에서 검댕을 잔뜩 묻혀 온 끔방이를 박박 씻기며 나는 거듭 사죄했다.
“언니가 미안해. 다음부터는 문단속 정말 잘할게.”
세상 구경은 이쯤으로 충분했는지 끔방이는 더 이상 밖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집안의 모든 벽지부터 내 여권에 핸드폰까지 갉아댔던 이갈이도 어느새 멈춰있었다. 나의 작은 털뭉치는 해가 갈수록 의젓해졌고 나는 오히려 더 철부지가 되어 끔방이에게 기대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첫 강아지.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나는 오늘도 끔방이에게 속삭인다. “딱, 10년만 더 언니랑 같이 살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