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의 정서 회복 여행, 그 두 번째
중환자실에서 일하던 간호사 시절, 의사 처방에 따라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다가 환자들이 회복하여 일반 병실을 옮기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던 날이 있었다. 몇 년을 같은 부서에서 일하다 보니, 같은 증상으로 반복해서 중환자실에 재입원하는 환자분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분들을 보며 참 많이 고민했었던 것 같다. 증상 간호 위주의 내 간호에도 스스로 약간의 모순이 느껴져 좀 더 본질적인 간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병이 그렇듯 증상만 치료하면 끝이 아니었다. 치료됐다고 생각해서 퇴원을 하는데 다시 증상이 재발되어 병원을 찾아온다. 환자 그 자체가 건강해져야 본질적으로 모든 증상도 해결되고 그 증상이 다시 찾아온다 하더라도 빨리 회복할 순발력이 생기게 마련인데 나는 스스로 눈에 보이는 증상 치료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해 본 명상은 휘몰아치는 '멀티맘'의 삶 사이에 여유라는 돌다리를 놓아두고 갔지만 순간적인 위안만을 두고 갈 뿐, 이 외에 뭘 할 수 있을까 답을 찾아보다가. 책을 읽기로 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본질은 책에 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을 읽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책 한쪽 읽는 것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숨 가쁘게 살아내야만 하는 '멀티맘' 곧, 싱글맘이니까. 어쨌든 그때는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아슬아슬하게 앞장섰기 때문에 지체 없이 곧장 전자책 앱을 결제하고, 쉬는 시간 10분, 점심 먹은 후 10분, 아이 픽업 전 10분, 이런 식으로 쪼개어 책을 읽었다. 가장 처음 읽었던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이 책은 지옥보다 더 참혹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체험으로 인간은 삶에 대한 의지를 찾을 수 있으며 인간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교훈을 주는 책이다.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담고 있다. 애교쟁이 아들내미와 단 둘이 싱글맘으로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게, 아내, 아들, 모든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서 생사여부도 알지 못한 채 굶주림과 폭력과 노동에 시달리며 절망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불행한가?
내가 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권유하면, 그런데 너무 극단적인 상황과 비교하는 거 아니냐고들 한다. 내 상황은 이 상황보다는 그래도 낫지. 그래도 지금은 시대가 다르잖아... 물론 나치가 판을 치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신에게 참 감사드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본 인간 본질의 핵심은 목숨을 위협받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스스로 삶에 대한 삶의 의지만 있다면 인간은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지고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그때 당시만 해도, 아주 교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끔 친구들이 나에게 고민상담을 해올 때면 속으로는 '네가 나보다 힘들어? 뭐 그런 것 가지고 힘들다고 징징거려.'라고 생각하거나,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더 먹겠다고 떼를 쓰면 '너 장난하니. 엄마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스크림 한 개 더 먹겠다고 우는 거야?' 하고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시니컬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명상을 하면서도 한 번씩 드는 이런 생각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이런 생각이 나의 감정에 좋은 영향을 끼칠 일은 없었다. '나는 불행해'라는 프레임만 나에게 갖다 씌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책을 통한 성찰로 얻은 통찰력을 실생활에서 처음부터 매 순간 - 특히 싱글맘으로서 서러워지는 그런 - 발휘하는 건 어려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싱글맘으로 세상 살기 힘들다는 그 패러다임이 확 바뀐 것이다. 매일 같이 부딪히고 깨져야 하는 상황에서 늘 스스로 불행하게 살 건지, 당당하게 살 건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나는 당당하게 사는 쪽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 뒤로 나는 사람들이 내가 싱글맘이라는 얘길 들으면 "너무 힘드시겠어요."라고 말할 때면 당당하게 말했다. 싱글맘으로 세상 살기 힘들다는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싱글맘으로 살아서 더 힘든 거 없어요. 신경 쓸 남편 없고, 시댁 없고, 온전히 아이한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좋고요. 애 재우고 내가 책 읽고 싶으면 책 읽고, 글 쓰고 싶으면 글 쓰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아이 키워서 힘든 것도 똑같이 힘들어요. 그리고 다른 남자랑 데이트도 할 수 있잖아요."
내가 싱글맘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이지, 싱글맘 가정이라서 경험하는 '다른' 형태의 경험들은 말 그대로 '다른' 경험일 뿐이다. 60억 인구가 다 다르게 생긴 것처럼, 60억 인구가 겪는 경험도 그냥 60억 가지인 거지 싱글맘이라서 특별히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세상이 싱글맘에게 주어진 환경에 좌지우지되라고 부여한 '싱글맘은 세상 살기 ㅈㄴ 힘듦'이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자, 비로소 내가 가진 사소하면서도 감사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