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나심과 아들 되심에 대한 성경적 관점
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 9:6, 바른)
예수님을 예언하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다. 그럼 성부 예수님이 되시는 것이다. 뭔가 논리적 모순이 일어난다. 여기서 아버지라고 칭해지신 것은 창조자이시면 근원자라는 뜻에서다. 그리고 아담을 창조하신 창조자라는 뜻에서다. [1]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성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도 하고 남편이 되시기도 한다. 이는 모두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관계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데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때 이 호칭들이 혼동을 이루어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교적 [2] 신들의 호칭이 가만히 들어온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지칭하셨을 때는 인간으로 오신 두 번째 아담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자신을 세상에 내어 보내신 그리고 마리아의 몸을 덮어 자신을 인간으로 인간의 몸 안에 잉태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호칭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른 호칭이다. 두 번째 아담이 하나님을 부른 호칭인 것이다. 결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호칭이 아니었다.
마치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원래 하나님의 신성이신 2위 하나님의 신격에 붙여지지 않고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으로 성육신 하신 사람이신 예수님께 붙여진 것과 같은 원리다.
만약 신플라톤주의적 이단 조직 신학의 신관에서 쓰는 호칭인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옳다면 예수님의 세례장면과 관련된 본문은 더 큰 모순을 가지게 된다. 성자 하나님은 이미 신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시고 인정이 되시는가? 벌써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잉태되시고 발생하시었는데 왜 또 잉태되고 아들로 태어나시는가? 또 신성하고 죄가 없으신 분이 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시는가? 그리고 로마서 1장에서는 왜 또 아들로 인정되시는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들로의 인정이 왜 다시 필요한 것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의 구속적 대속의 삶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오셨다. 피와 살을 가지고 죽음이 두려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씨)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대속의 제물이 되시고 인간을 대신하여 승리의 삶을 사시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피와 살을 가지고 오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사셨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 용서를 위해 죄인이 받는 물세례를 왜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이신 3 위격 중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왜 성령님을 새로 받아야 하는가? 모두 예수님의 신격의 관점에서는 필요치 않은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두 번째 아담 즉 사람으로 오신 대속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죄인이 아닌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한 대속의 삶을 사셨기에 죄인처럼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고 성령님을 받아 거듭나는 장면이 필요한 것이다. 대속의 제물인 사람으로 어린양으로 오시어 우리 대신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내용이다. 죄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하신 대속이었다. 사람의 죄를 사람으로서 대신지고 가신 것이다. 첫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두 번째 아담의 대속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들이라고 불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모두 우리를 위한 대속의 사역 중에 대속의 관점에서 우리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을 부르신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와 그리고 이와 동일한 표현인 아담의 후손 즉 인자라는 표현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고 만물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라고 하신 명령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권세를 예수님께서 회복하시고 그 권세를 통해 모든 일을 성령님의 한량없는 기름부음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스스로 노력으로 권세를 얻어보려고 산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기도 하고 소위 영빨이 높다는 더 큰 기독교 무당들에게 가서 머리를 들이밀고 영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빨 자체가 무기가 되고 계급이 되고 그 영빨이 의해 종이 되어 하나님의 종이 아닌 그 영빨 가진 자의 종이 되어 복종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무당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들에서 굿을 하는 것이다. 과연 그 영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출처를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자신만 듣는 것처럼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또는 이에 대한 폐해에 지쳐 트라우마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모두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만인제사장설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영원발생설의 문제를 거론하는 목적은 교리적인 분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영원발생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데 그것은 이교적인 사상이요 그 사상을 수 천 년에 걸쳐 교회 안에 들여놓은 원수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영원발생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 그래서 창조된 것은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설이다. 가설인 이유는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성경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러한 사상은 이교의 신학에 등장한다. 플라톤과 신플라톤 그리고 스콜라와 스토아학파에 존재하던 사상이다.
이 이교적 거짓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가만히 들어온 목적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삼위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차등이 없는 하나님이심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 즉 하나님 보다 하등 하신 분이 아니신 동일한 하나님이다. 이 진리를 교묘히 깨뜨려 이단적 교리를 믿는 기독교를 생산하려 한 것이다. 성경적 관점도 그러하고 부흥을 연구한 마틴 로이드 존즈의 견해도 일치하듯 이단적 교리를 가진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다. 부흥이 온 사례가 없다. 사탄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이단적 교리를 생산한다.
거짓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들어온 두 번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숨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근원부터 그러한 것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양자 됨 즉 아들이 아닌데 아들로 겨우 인정만 하여 주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이다. 아들 됨은 원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오직 낳음을 받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 아담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다.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므로 하늘과 땅의 권세도 예수님께만 온전히 적용되는 것인 것처럼 보인다. 오직 인간은 예수님의 권세의 일부를 겨우 사용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게 된다.
세 번째 거짓신학을 신학에 심은 사탄의 목적은 거짓신학을 심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인간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인간이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권세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드리는 일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은 원수 사탄에게 자신의 권세를 빼앗기고 그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기억 상실의 상태에서도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에 사탄의 조종에 의해 자신의 권세를 사탄을 위해 사용한다. 결국 그 권세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기억상실에 걸려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강력한 권세를 아버지를 괴롭게 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탐욕에 젖은 비참한 짐승으로 만든다. 욕심의 썩은 고기를 찾아 그 구더기들이 덮은 그것을 탐욕의 침을 흘리며 삼킨다. 그 탐욕을 위해 옆에 있는 동료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필요하다면 그 동료를 죽여 인육도 먹어 치운다. 태초에 솔로몬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지혜를 소유했던 덮는 그룹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였던 그는 이제 썩은 고기와 그것에 이는 구더기를 삼키는 하이에나보다 더 비루한 존재가 되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킬 길이 없으니 온 세상을 도둑질하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길을 선택한다. 현대나 과거의 역사가 포장되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실상을 알고 나면 그것의 실상이 200여 년 전 독일의 동부출신 사상가 칼이 발견한 것보다 더 비참함을 알 수 있다. 단순히 계급투쟁이 아니라 주변의 생명을 갉아먹고 그 생명을 흡혈하여 살아가는 흡혈귀가 인간의 본질이다. 독사의 새끼들의 끝없는 살육전이 역사의 본질이다. 좀비들이 세상을 점령한 것 같은 지옥도가 세상이다. 무엇이 공평인지 불공평인지 인간들은 분간하지도 못한다. 인간들은 그런 악함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 앞에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타인이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해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부동산이 오르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집의 가격이 올라 기뻐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자신이 돈을 번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거대한 세력이 돈을 버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1억에 산 집이 3억으로 오르면 가격이 올랐다고 기뻐한다. 그런데 사실 자신도 돈을 번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집을 팔고 같은 집을 사려면 또 3억을 줘야 한다. 같은 집을 1억에 살 수 있는 것과 3억에 살 수 있는 것 중 무엇이 이득일까? 그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팔아서 쓰면서 살면 될 것 아니냐?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집을 팔면 나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 월세나 전세를 산다면 또 오른 가격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 나는 번 돈으로 그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결국 나는 이익을 본 것이 없다. 단지 집에 붙어있는 숫자가 1에서 3으로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내 아들이 같은 집을 사려면 3억을 주고 사야 한다. 전에는 1억에 살 수 있었는데 3억을 줘야 살 수 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중심가는 수십억을 주어야 한다. 변두리도 5억 이상을 줘야 한다. 결국 내 아들은 집을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평생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변변찮은 직장을 다니는 내 아들은 집을 살 수 없다. 대기업을 다닌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대출이 대부분이라 벌어서 대출원금과 그 이자를 갚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집값은 멈추지 않고 오른다. 과연 집값이 오르면 누가 돈을 버는 것일까? 건설사의 정점에 있는 회장들이다. 똑같은 건설단가에 1억에 팔아도 엄청난 이익이었는데 3억에 팔면 이전에 비해 미분양이 많아도 무조건 이익이다. 집값이 3배가 올랐으니 집들의 3분의 1만 팔아도 이전에 1억에 팔 때와 똑같은 이익이 남는다. 사실 미분양이 조금 있어도 3분의 2가 미분양이 될 수는 없다. 3분의 2가 미분양이 되어도 무조건 이익이다. 이전에 똑같이 생산했을 때와 같은 이익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슬쩍 1~2 천만 원을 내려서 분양하면 남은 미분양 물건도 무조건 분양된다. 1억에 팔던 걸 2억 8천에 파니 얼마나 이익인가 그런데도 눈속임으로 3억에서 2천만 원이나 싸게 파는 척하면서 눈속임을 한다. 이것은 가격담합과도 같다. 그런데 그것이 시장의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니 정부가 규제하기도 힘든 문제다. 지각없는 일반인들이 부동산이 오르면 자기 집에 붙은 숫자가 바뀌니 무조건 이익이다 싶어서 빚을 내서라도 투자랍시고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누구에 의해 무슨 목적을 위해 조종당하는지도 모르고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데 일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들어낸 것이 헬조선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태를 누가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순진한 생각을 버리기 바란다. 여러분은 조선시대의 노비보다 당신의 삶이 낫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인권에 있어서는 개선이 된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의 질과 강도에 비해 여러분이 얼마나 처참하게 착취를 당하는지 알지 못한다. 집값만 봐도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분은 평생을 벌어도 갚기 어려운 착취를 당했는데도 알지도 못한다. 평생을 이름만 자유인인 노예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의 입장에서도 개선이 된 것이 맞는가? 개선된 것처럼 하면서 더 철저히 짓밟고 착취하지는 않는가? 조선시대 노예는 재산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리고 주인이 원하면 성 상납을 해야 했다. 주인이 원하면 딸을 바치기도 해야 했다. 남자도 성적 노리개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 지금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성 상납을 하게 한다. 그러한 일들의 일부가 미 투 운동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조선시대 노비는 주인에게 미움을 사면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한다. 지금 우리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그런 일들을 당한다. 이것이 더 무섭다. 예전에는 그렇게 당하는 줄 스스로도 알고 타인도 알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당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타인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당해보면 그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기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삶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병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더 악해져서 죄악의 나락 같은 늪으로 빠져든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지, 우리나라는 세계 자살률 1위다. 이혼율도 세계 1위다. 왜 청년들이 3포를 하는지, 인생을 시작도 하기 전에 절망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왜 그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하는지 알지 못한다.
눈앞에 작은 사탕으로 인해 여러분은 누구나 나는 무조건 이익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인류의 역사는 착취의 역사다. 착취하는 자들도 더 상위의 포식자에게 착취를 당한다. 그리고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들도 다른 하위의 먹이들과 마찬가지로 착취를 당하는 인생을 산다. 모든 인생이 사탄과 그 졸개들에게 도둑질당하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속아서 죄짓다가 죄의 결과로 심판을 당하는 것이다. 지옥의 불길에서 눈을 떴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도둑질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도둑질하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역사다. 여러분이 스스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상을 떠나 산중에서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러나 여러분에게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이다. 돌보아야 할 가족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해야 한다. 정상적인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한 여러분은 이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다. 부동산 하나만 봐도 우리의 삶은 사탄의 본능을 따른 짐승의 삶이다. 모든 분야에 이러한 것이 물들어 모두 검은 늪이다. 그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우리의 생이다. 그것을 벗어날 길은 없다. 점점 그 늪에 깊이 빠져들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나 자신 하나하나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그렇다. 그래서 그렇게 산다. 하나하나 들이 모여 스스로 지옥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독사의 새끼들인 것이다.
이런 애통할 인간의 처지를 알리고 다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인간의 권세를 사용하도록 돌이켜 회개하게 해야겠다. 이를 위해 이러한 원수의 음모를 알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나 인자에 관해 비성경적인 오류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진리를 바로 세워야 그 진리를 뼈대로 해서 온전한 건물이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은 항상 진리를 가려 혼돈케 함으로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해 만물이 자유케 되는 부흥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종말적 회복을 막으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고 있다.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 속 용어에 집중하는 목적도 혼돈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명확히 드러내려는데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 인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께 이루어드리는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1] 따라서 예수님은 아담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계보에서 아담의 아버지가 예수님이 되면 뭔가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인간이신 예수님 즉 두 번째 아담이신 사람이신 예수님과 신성의 예수님 즉 3위일체 하나님이신 신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잘 구분 지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두 번째 아담의 아버지가 3위일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두 번째 아담 즉 인간이신 예수님에 한정된 문제인 것이다. 또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육적으로 아버지가 아담이 아니다. 아담의 계보를 벗어난 새로운 아담 두 번째 아담이시다.
예수님은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나셨다고 했다. 사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이었던 요셉 외에 다른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구약의 예언도 충족하신다. 즉 육신의 계보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것이 된다. 요셉이 유전적이고 실질적인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기 때문에 요셉의 아들이 되어 결국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시는 것이다.
[2]특히 헬라적 신론의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