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고구마를 수확했다. 물론 내가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나비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몹시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백수였다.
내 하루 일과를 적어보자.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기상해 방과 집을 청소하고 나비의 아침을 준다. 이후 나비와 함께 아침잠을 추가로 더 잔다. 그러면 보통 10시에서 11시 사이가 된다. 나는 그제야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는다. 나비에겐 아주 소량의 간식을 준다. 괜히 나 혼자 먹는 게 싫어서. 그 후엔 나비와 사냥놀이를 한다.
오후가 되면 빈백에 누워 다시 잠을 잔다. 낮잠이다. 보통은 나비도 함께 잔다. 그리고 게임을 잠깐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비가 놀아달라고 하면 사냥놀이를 중간중간한다. 나비는 사냥놀이가 질리면 집안을 돌아다니며 호기심을 해소한다. 엄마 방이나 할머니 방의 장롱을 타고 오르는 게 대표적이다.
오후 5시 30분이 되면 우사로 향해 청소를 하고 소들의 밥을 준다. 그러고 보면 소들도 고양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물론 초식동물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내가 그렇게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암소들은 예민하고 겁이 많다는 것과 수소들은 호기심이 강하다는 점이 그랬다. 나는 우사를 청소할 때마다 수소들과 가벼운 인사를 한다. 그 녀석들은 내가 익숙해져서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손가락으로 콧등과 미간, 뿔과 귀 뒤를 긁어주면 더해달라고 달려든다.
반대로 암소들은 절대 손길을 받아주지 않는다. 사실 나는 암소에 대한 공포가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있다. 아마 때는 내가 고향으로 내려와 막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나는 엄마와 함께 우사를 청소하고 녀석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물통을 닦아주고 송아지들의 밥통이 비었는지 확인하던 나는 문득 낯선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아직 양수가 다 마르지 않아 축축한 털을 하고 바닥에 앉아 있는 송아지다.
엄마?
왜?
송아지 낳았는데?
우리 우사의 임신한 소들은 출산예정일 한 달 전부터 산실을 배정받아 혼자서 생활하는 게 보통이다. 송아지는 태어나면 보통 2시간 이내에 걸음마를 시작한다. 그전에는 몸을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앉아 있거나 일어나려고 애를 쓰는 과정이다. 문제는 이 2시간 동안 같은 방을 사용하는 다른 소들이다. 소들은 뒷걸음을 칠 때 뒤를 확인하지 않기에 갓 태어난 송아지들을 밟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송아지는 그것을 피하지도 이겨내지도 못한다. 이런 사고는 보통 송아지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 우사는 저러한 규칙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간혹, 출산예정일보다 빠르게 태어나는 녀석들이 있다. 그 송아지도 그러했다. 엄마와 아빠가 깜짝 놀라 다가와 송아지를 확인했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열심히 핥아주고 있었다. 급하게 방 배정이 시작되었다. 송아지가 죽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비어있는 산실로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울타리를 넘어 내 키만 한 소들과 대치하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사실은 그런 경험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지만 그날은 소소한 사고가 조금 있었다. 하필이면 임신 중인 커다란 암소가 자동목걸이에 걸리지 않은 상태로 옆방의 문이 열려버렸고 다른 암소의 출산으로 인한 냄새가 그 녀석을 자극한 것이다.
뿔이 날카롭게 솟은 녀석은 비틀비틀거리며 이동하는 송아지에게 자꾸만 다가오려고 했다. 저 뿔로 송아지를 들이박기라도 하면 이 역시 송아지에겐 치명적이라 죽음으로 직결된다. 나는 아직 우사의 일이 서툴기 때문에 아무런 방어 도구도 들지 않은 상태로 대뜸 그 소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야 세상으로 나온 작은 송아지를 죽게 만들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나는 간과했다. 내가 보던 소들은 늘 울타리 안에 갇힌 상태였고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커다란 소와 내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녀석은 양수 냄새에 흥분을 한 상태였다. 울타리 밖에서 내가 걷기만 해도 슬금슬금 도망가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눈높이마저 나와 비슷한 소와 눈을 마주친 채로 얼어버렸다. 생각보다 소는 더 컸고 흥분한 채 씩씩 숨을 내쉬는 소리가 공포스러웠다, 저 뿔에 받히면 사람도 갈비뼈가 나간다. 하지만 나는 내 등 뒤에서 지쳐 넘어진 송아지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송아지가 죽는다,
아빠. 이쪽으로 좀 와줘. 얘 너무 무서워.
아마 내 목소리도 덜덜 떨렸을 게 뻔했다. 늦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아빠는 칸막이를 하나씩 정리하며 오느라 더뎠다. 그 사이에 내 눈앞에 소는 각도를 틀어가며 나와 송아지를 위협하고 있었다. 거짓말 안 하고 너무 무서워서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녀석은 내가 겁에 질린 것을 알고 있는 듯 더 거세게 나를 위협했다. 하지만 녀석과 나의 대치는 허무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방 배정을 마치고 다가온 엄마가 들고 있던 빗자루로 나를 위협하던 암소의 뿔을 탁 내려치자마자 녀석은 깜짝 놀라 도망을 갔다.
방 배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엄마는 여러 가지를 말해주었다. 소들은 눈치가 빨라 상대가 무서워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다는 것. 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언제든지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 우사에서 일을 하다 뒷발로 걷어차이거나 뿔로 들이받아 병원으로 실려가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 그리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야 할 때는 반드시 소들을 위협할 수단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
아무튼 나는 그런 이유로 암소들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녀석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눈을 마주치면 식은땀이 날 정도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걸까. 오늘의 기록도 여전히 두서가 없다.
그렇게 우사의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으면 7시. 나비의 밥도 같이 준다. 이후의 저녁 일과는 매일매일 다르다. 게임을 하다 조금 늦게 잘 때도 있고 일기를 쓸 때도 있고 나비와 빈백에 드러누워 손가락으로 가벼운 사냥놀이를 할 때도 있다. 과일을 깎아서 먹을 때도 있고 엄마 방에서 TV를 볼 때도 있다. 적어두고 보니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확신이 든다. 나는 그저 아침에 일찍 일어날 뿐 여전히 게으르다.
그렇다면 나비가 오기 전 내 하루 일과는 어떠했을까.
오전 11시에 기상을 한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대충 먹는다. 이때는 내가 아침으로 우유와 식빵을 자주 먹던 때다. 그러고 나서는 곧장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즐겼다. 여름이었으니 햇빛이 너무 뜨거우면 거실로 들어가 플레이 스테이션을 켜서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아직 내가 완벽하게 약을 끊지 못했던 때라 낮잠은 즐기지 못했다, 약의 도움 없이는 밤에도 잠을 푹 자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간간히 가족들과 대화를 했다. 내 감정 기복은 아직 회복 중인 상태였기에 조금만 기분이 틀어져도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기 일수였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그런 일들을 모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주었다.
하루는 그런 날이 있었다. 내가 설거지와 같은 소소한 집안일은 종종 하곤 했지만 집안일의 대다수는 할머니의 몫이었다. 그날도 할머니가 내게 빨래를 가져다주시며 방에 정리하라고 가볍게 한 마디를 했다. 나는 그 말에 심기가 뒤틀렸다. 내 행동은 누가 봐도 잘못된 일이었다. 나는 괜히 할머니에게 알겠다며 짜증을 내버렸다. 나는 그런 내가 아주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재수가 없었지만 감정이라는 건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대로 잘 따라주지 않았다. 짜증을 내고 나서야 내가 잘못을 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냥 뒤 돌아 나가셨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가 내게 슬쩍 다가와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를 참으며 울어버렸다.
선생님이 이야기하기를 내 우울증은 통증과도 같아서 언제 어떤 외부 자극에 의해 되살아 날지 모른다고 했다. 어떤 날은 그냥 참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의 작은 통증에도 반응하게 될 것이고 어떤 날은 어떤 통증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게 될 때도 있을 것이라고.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일까, 내 우울증에 완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초보 집사의 어설픈 하루를 기록하고 있는 오늘, 10월 22일 밤. 나는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여기까지 오는 것에는 가족들의 많은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갑자기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집 한 구석에서 백수 생활을 시작한 딸을 그저 묵묵히 참아주던 엄마와 아빠. 내 감정을 건들까 조심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내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반드시 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 남자 친구. 갑자기 내 일상에 뛰어들어 당연하게 해야 하는 것들을 더욱 당연히 하게 만들어준 나비. 나는 그렇게 지금의 평화를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흘러간 것은 흘러가 버린 것으로 두고 지금에, 그리고 미래에 조금 더 집중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비와 만난 지 어느새 두 달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비는 중성화를 했고 오늘 2차 접종을 받았다. 내가 처음 나비와의 일을 기록한 게 9월 말 경이니 이제 슬슬 밀린 기록도 끝이 나고 있는 것 같다. 나비와의 지난 두 달의 일을 떠올리며 그때의 감정을 되살려 기록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일기의 시간이 드디어 현실을 따라잡게 되는 것이 정말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