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사진으로 보니 뭔가 귀엽고도 아늑해 보이는 트램을 타고 향한 첫 행선지는 피츠로이.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유명한 크루아상을 맛볼 겸 서점도 갈 겸, 멜버른의 홍대 혹은 성수라고 불리는 피츠로이를 향했다. 트램에서 내려 카페로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파란 하늘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벽면 일부 혹은 가득 그라피티로 채워진 건물들을 지나 회색의 카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 쪽에 공사를 하고 있어서 깜박하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안으로 들어오니 생각보다 높은 천고에 넓은 실내가 펼쳐지고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줄이 그렇게 길지 않다. 테이크아웃을 하는 손님들도 많았지만 나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 갈 예정이라 물어보는 직원 분께 착석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실내 중앙에 모형으로 보이는 다양한 크루아상 메뉴가 나열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주문을, 뒤로는 직원 분들이 열심히 크루아상을 만들고 있었다.
인기메뉴인 아몬드 크루아상과 내 사랑 차이티라테를 주문하고 운 좋게 카페 정중앙을 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눈앞에 놓인 크루아상은 생각보다 크고 알찬 느낌이라 크루아상을 자르기 위한 칼이 왜 과일 깎는 칼 같은지 알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잘라본 크루아상의 내면은 마치 파이(pie) 같은 느낌으로 알차게 채워져 있었다. 고소한 아몬드와 달달한 파이 같은 질감이 어우러져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는 든든함을 느끼게 해 준 LUNE의 크루아상. 더욱 히트는 함께 주문한 차이티라테였다.
그전까지 나에게 있어 차이티라테의 맛은 스타벅스의 그 맛이었다. 흔히 차이티라테는 그 특유의 맛 때문에 호불호가 강한 음료이다. 하지만 멜버른의 차이티라테는 달랐다. 불호를 일으키는 특유의 맛보다 부드러운 우유와 시나몬의 향이 어우러져 누가 마셔도 무난하게 마실법한 라테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차이티라테의 신세계를 맛보다니. 오늘 하루도 차이티라테의 마법으로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칼튼 가든 & 피츠로이 가든
피츠로이를 떠나기 전 서점에서 귀여운 고양이 일러스트가 가득한 책을 한 권 사들고 칼튼 가든으로 향했다. 이 날은 날이 좋아서 칼튼가든까지 사부작사부작 걸어가며 조용한 멜버른의 마을도 한껏 느꼈다. 칼튼가든과 피츠로이 가든은 날씨가 좋을 때 가고 싶어서 이때까지 가지 않던 곳이었다. 이 날 아침 문 밖을 나서니 청명한 가을 같은 하늘이 반겨주고 있어서 '오늘이 바로 가든데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조금씩 걸어서 뮤지엄을 지나 칼튼가든으로 진입하니 유럽풍 건물과 멋진 분수가 나를 맞이했다. 분수 앞이 포토스폿이었는지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는 웨딩촬영을 하는 듯한 커플도 있었는데 마침 6월에 웨딩촬영을 한 사람으로서 '오, 예쁘다'보다는 '오, 고생하시겠다'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나는 춥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저녁때 야외에서 촬영할 때 꽤 추웠는데 지금은 호주의 겨울이니, 드레스를 입으면 쌀쌀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옆에서 남편이 역시 T...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군)
분수대를 지나 공원을 한 번 둘러보니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잔디에 자리를 잡고 그들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돗자리는 없었지만 나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서점에서 사 온 책을 펼쳤다. 여행을 가서 가장 여유를 느끼는 때는 바로 그 지역의 공원에서 보내는 시간인 것 같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런던의 하이드 파크같이. 특히나 날이 좋을 때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면 마음이 너무나 평화로워진다. 나에게 있어 이러한 기분을 멜버른에서 느끼게 해 준 곳은 바로 이곳, 칼튼가든이었다.
날이 조금 흐려지나 싶어서 슬슬 일어나 피츠로이 가든으로 향했다. 피츠로이 가든으로 향하는 중에 북페어 관련된 표지판을 보게 되었는데 날짜가 9월 9일-10일이었다. 내가 떠나고 일주일 후라니. 한 주만 빨랐어도 멜버른의 북페어를 구경할 수 있었는데 괜스레 아쉬웠다.
다행히 피츠로이 가든에 오니 다시 하늘이 맑아졌다. 피츠로이 가든의 conservatory 쪽으로 다가가니 결혼식이 있었는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커플이 밖으로 나와 축하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나라서 더욱 그들이 눈에 띄었던 것일까? 불과 반년 전만 해도 결혼식장을 찾아 헤매던 나였기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곳을 대여해서 결혼식도 할 수 있는 것인가? 너무 멋지다'라는 생각이었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든을 둘러보다 잠시 벤치에 앉아 책을 읽어보려 했지만 어느덧 날이 조금 쌀쌀해져 왔다. 날이 쌀쌀해지니 따뜻한 국물이 급 생각나서 근처에서 먹을 곳을 찾아볼까 했는데 검색해서 나오는 곳들은 모두 다 닫을 시간이라 조금 애매했다. 이대로 헤매다가는 이도저도 안될 것 같아서 얼른 다시 시내로 돌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