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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Sep 15. 2023

오늘 기분은 이유 없는 흐림

기분이 수직낙하할 때 점검해봐야 할 것들



토요일 아침부터 기분에 찐한 회색 먹구름 떼가 껴있다. 비 예보도 없이 울듯 말 듯 하늘이 꿀렁꿀렁 우산을 챙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그런 흐림. 별 이유 없이 그냥 기분이 그러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요건이 그러하도록 압력이 가해지니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인 '그냥'. 눈만 천천히 끔뻑끔뻑 침대에 납작하게 눌려있다. 왜 그러니? 뭐가 마음에 안 드니? 뭐가 문제인데?, 개중 문제 해결에 가장 적극적인 A가 앞장서 물어보려는데 세상만사가 덧없는 B는 또 시작이야? 이제 지겹지도 않니? 언제까지 그럴 건데, 하며 날 선 말투와 모진 눈빛으로 나서려는 A 앞을 막아선다. 너 붙잡고 이러네 저러네 말하기도 들어주기도 지친다, 흡사 오랜 연인 사이의 다툼을 연상시키는 B의 한 마디는 상황을 차갑게 종결짓는다. 머리통 사뿐히 떼어 몸과 잠시 분리해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남아있는 필터의 찌꺼기를 박박 거품 내어 씻어내는 상상으로 생각이 미친다. 단번의 애씀이면 마음 안쪽의 풍파도 흔적 없이 씻겨져 나갈 텐데. 그럼 고민쟁이의 거추장스러운 삶의 무게를 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기 없이 뽀송하게 말리는 탈수 기능까지 장착한 이런 기계는 얼마를 지불하면 손에 쥘 수 있을까? 효용 없는 망상은 얼마간 이어진다.



현실 내 방으로 돌아와 한 편에 영상을 틀어 귀를 반만 떼어주고 손에 헐렁하게 쥔 검은색 액정 화면 위 손가락 연주를 하고 있다. 내밀한 말을 속삭이고 들어주는 기능은 진작 퇴화해 버리고 아작아작 저작하는 입만 무보수 야근 중이다. 일요일 아침, 먹구름 꼈던 기분은 순리인 듯 폭우의 얼굴로 바뀐다. 월요일 밤부터 주말만 기다렸던 이유. 바라던 바로 집에서 꼼짝 않고 나가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왜 갈수록 기분이 더 뾰족하게 각지고 침전될까. 널뛰는 감정의 저울대는 언제쯤 잔잔한 수평대를 이룰 수 있을까. 이제 좀 잠잠해졌나 싶다가도 충돌하는 쉼 없는 분쟁 상태.



메모장을 열어 이유 없이 기분이 수직낙하할 때 점검해봐야 할 목록들을 줄 세운다. 생각이 두 발 달아 도망갈까 다급한 손으로 갈겨써 내려간다. 모의고사 영어 듣기 평가하는 열아홉이 되어 모든 감각을 하나로 모은 채 내가 말하는 대로 듣고 순차별로 받아쓰기한다.



1. 영양소가 충분한 식사를 챙겨 먹었는지. 특히 밥심이 날 수 있는 탄수화물. 탄수화물에서 인심 난다고 부족하면 사람이 예민해지고 사나워진다.

2. 제때 잠자리에 들었는지.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고 중간에 깨진 않았는지. 수면 리듬이 깨지지 않게 관리한다. 잠을 잘 자면 그날 하루가 평온하다. 반대인 날은 사소한 힘도 내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 비관과 자기 비하 모드가 풀착장된다.

3.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었는지. 자발적 고독과 사유 노동은 존재의 확립을 돕는다. 사색의 양에 비례해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고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겸손이 생긴다. 나에겐 끼니를 챙기듯 규칙적으로 사수해야 하는 시간이다.

4. 일에만 파묻혀 살진 않았는지. 일에 빠져있는 시간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일에서 빠져나온 후 찾아오는 허망과 공허의 빈도가 잦아진다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건 아닐까.

5. 작은 기쁨을 수집하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얼마나 빈번히 챙겨줬는지 확인한다.

6. 나를 지지하는 사람과 대화한 지 얼마나 됐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응원과 온기는 그 수많은 그럼에도, 살아낼 수 있는 용기를 준다.

7. 집 안에만 있지 않았는지. 하루 걸음수가 줄진 않았는지. 장시간 햇빛을 보지 않거나 활동량이 줄어들면 기분 회로 체계가 우울 모드로 전환되는 특성을 이해하고 움직인다. 하루 20분 걷기면 충분하다.

8. 평소보다 휴대폰 사용 시간이 길어지지 않았는지. 실시간 업데이트되는 소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다른 삶을 열심히 파도 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9. 현재가 '과거와 미래' 2인조에게 착취당하고 있지 않은지. 이미 지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주위를 배회하며 우울과 불안의 파동 위에 탑승한 건 아닐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내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리라.



지식과 경험으로 체화한 데이터를 내리 적다가 일순 멈칫하기를 여러 번. 내가 쓴 언어의 가시가 중간 목에 따갑게 걸려있다. 흩어져있는 말들을 모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5번과 7번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방법으로 아끼는 빙수집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넓게 보면 8번과 9번도 포용하는 일.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끓고 있는 시나몬의 달큼함이 코 끝에 내려앉는다. 한 달여만에 뵌 사장님은 여전히 푸근한 웃음으로 반겨주신다. 주문을 하고 앉아 느리게 흘러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갈하고 소박하게 단장한 빙수가 앞에 놓인다.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 축축하고 곰팡이 핀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이 끝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던 마음의 냉기는 시원하고 고소한 빙수 한 입에 맛있어. 행복해. 이거 맛보려고 사는 거지, 닿을 것 같지 않았던 구만리 떨어진 마음의 땅으로 넘어온다. 입 밖으로 꺼내기도 민망한 이 우습고도 가볍고, 어렵고도 단순한 마음이란 삶의 동반자.



균형 잡힌 삶이란 별거 없는 듯 별게 있다. 사소한 것들을 잊지 않고 챙기는 리듬이 살아있는 삶. 여느 때처럼 제때 일어나서 아침을 챙기고, 지금 당장 내키지 않더라도 나와 한 약속(일기 쓰기나 운동 같은 당장 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지 않는)을 미루지 않고 해내고, 잠깐의 좋지 않은 기분 때문에 하루를 망치지 않는 것.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대단한 이벤트가 없어도 그렇게 물 흐르는 대로 잔잔히 흘러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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