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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Jun 13. 2023

가만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언덕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연습



가보고 싶었던 집 근처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한숨 돌리고 있는데 친구 사이로 보이는 한국인 두 명이 옆자리에 앉았다. 치앙마이를 곧 떠나는 둘은 이곳에서 머물며 있던 일들을 훑으며 돌아봤다. 붙어있는 테이블 사이 둘의 대화를 향해 귀가 빳빳하게 세워진다.


평소에 좀 바쁘고 활발한 사람이 여기 오면 불안할 것 같아. 생각보다 할 게 없어 너무 심심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도시란 실재할 수 있을까. 속도 사회에서 나고 자란 일반적인 한국인으로서 그런 미지의 세계가 열린다면 순식간에 매료될 것만 같았다. 도돌이표처럼 구간 반복하며 돌아가는 일상에서 한 호흡 가다듬을 수 있는 선택을 했다. 수많은 선택지 중 이곳에 오게 된 건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옹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착하고 처음 몇 날은 마음이 가빴다. 뭐든 더 많이 보고 많이 해야 한다는 까닭 모를 힘의 누름에 아침 일찍 나가 해가 지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래야만 잠자기 전 베개맡에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머리를 굴려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짜고 이곳저곳 다녔다. 체감 온도 40도가 육박하는 곳에서 여행자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한껏 펼친 양산을 비웃는 볕 아래에서 10분만 걸어도 몸의 수분이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멋모르고 덤볐던 어린 시절처럼 며칠을 그렇게 다니다 보니 더위를 먹고 사서 고생한 꼴이 났다.



이곳에 와서도 뭔가 해야 하고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관심이 가지 않는 유적지를 방문하거나 액티비티를 즐기는 사례를 보며


이 도시 방문객의 필수 코스라는 이 사원에 가봐야 하는 걸까?

이 클래스가 매번 매진인데 참여해 봐야 나중에 후회가 없지 않을까?


순간 뇌리에 번쩍하고 신호가 찾아왔다. 나의 좋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남의 좋음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버리고 싶었던 습성을 비행기에 실어 이고 지고 머나먼 이 땅까지 가져와 똑같이 학습하고 있었다. 넓은 세계를 누리고 있지만 한 평짜리 감옥에서 수인으로 지냈다.



참가 의사가 없었던 경주에서 점점 쳐지는 끝자락쯤, 가망이 없다는 느낌에 그 자리 그대로 가만히 굳어버리는 꿈을 꾸곤 한다. 앞으로 질주하고 있지만 지나온 길 어딘가 알맹이를 흘리고 온 것 같다고 느낄 때 그랬다. 고개를 돌려 쓱 옆을 보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고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내며 살고 있다. 보고 있노라면 엄습하는 불안감에 내 선을 떠난 일을 꾸미고 시도해 보지만 그때뿐이었다. 되지도 않는 걸 반복해서 왜 스스로를 조이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는 손에서 밀려오는 정보를 파도타기 하는 것을 쉼이라 여겼다. 동시에 전적의 부끄러움을 곱씹거나 벌어지지 않은 불행을 성실히 옆에 쌓아두었다.




이곳에 와서도 변함없이 달아매여 있다고 자각한 후 이 여행이 가지는 의미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더 이상 시간에 쫓기거나 남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먼저 느린 속도를 가진 도시에 발맞춰 보기로 했다. 할 것이 없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할 것이 없어서 안녕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 도시는 내게 무엇을 해야 하고, 되려고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준다.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은 도시였다면, 나만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발 밑의 불안이 여전히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을 것 같다. 계획이 없으면 불안하지만 계획을 세워놓고도 따라 하는 게 힘든 이상한 성향의 나는, 이 도시가 나를 위한 맞춤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내 속도에 맞는 삶을 찾고 싶다. 굳이 뭘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언덕에 앉아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에 감각을 맡기는 것. 그런 삶도 할 만하다고 저 멀리서 따라온 이에게 옆자리를 내어주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오늘도 자연의 은총을 머금은 골목의 정취를 느낀다. 고유의 빛깔을 내뿜는 잎들과 나무는 제 자리에서 고요하다.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와 함께 심심한 이곳에 감응한다. 가진 진가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이 공간이 꽤나 마음에 든다. 몸이 분주한 사람, 마음이 수선스러운 사람 모두에게 여백을 남기는 이 도시의 잔상이 오래도록 코 끝에 배어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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