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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Jun 22. 2023

날개를 달아 날려주는 일

반복 속 의미를 떠내는 것


 


치앙마이에 살면서 줄곧 들락날락하는 은밀한 방앗간이 생겼다.


세모 지붕이 달린 2층 건물의 하얀 외관에 목조 문을 열고 발 딛고 들어가면 책의 온기가 팔 벌려 맞이한다. 10평도 안될 것 같은 공간이지만 그래서 더 너와 나만의 아지트 같은 그윽함을 주는 곳이다. 이곳에선 호기심 고인 두 눈을 어느 곳에 심어야 할지 알 길이 없다. 다방면의 예술 서적으로 빼곡하다. 처음 우연히 발을 들였을 때, 전 세계 예술가들이 면면이 연주하는 공연에 취한 달뜬 마음은 해가 지고 나서야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태국어도 영어도 영 별로인지라 그간은 책방에 들르더라도 그들과 온전한 하나가 되어 즐기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책들이 모인 곳이 주는 정조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길 가다 책이 가득 메워진 벽면을 마주치면 새 친구를 사귀듯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표지 위주로 고른 책에서 그림이나 사진, 색상이 많이 들어갈수록 발길을 잡았다. 그렇지만 까막눈이 되어 더듬거리는 세상은 쉽지 않아 이내 손에서 멀어졌다. 나는 매번 지곤 했다.



참새 방앗간이 된 서점은 어떻게 방앗간이 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나의 부족한 문해 능력을 돕는 작가만의 독자적인 그림이 함께하는 책들이었다. 그림을 향유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림 덕분에 번거로이 사전앱을 켜지 않아도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복락이 컸다. 그림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글의 의미에 더 감읍할 수 있었다. 글을 부리고 주무르던 세상에 있다가 까막눈이 되고 나니 그림이 나를 배려해 해석 노동을 덜어주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읽기 시작할 때쯤 보는 책들은 하나같이 활자가 큼지막하고 차지하는 비중이 적고 그림은 다채로웠다. 그래서 책과 어렵지 않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다 커서 오래 전의 벗과 다시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 역시 글의 심부름을 돕는 그림 덕분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내 글과 그림을 곱씹었다. 혹시 글이 서먹한 누군가에게 활자와 수다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거리의 틈을 좁히는 일을 하고 있진 않을까.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동그라미 안 눈, 코, 입 점을 찍는 무의미한 반복처럼 느껴지는 일상에서 의미를 떠내는 것은 내 몫이다. 왜 지속해야 하는지 치열한 물음에서 질 때도 있다. 가끔 져서 축 처진 어깨를 하더라도 이만하면 꽤 그럴듯한 답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색색깔 돌멩이를 주서와 보석함에 담는다. 매일 밤 침대맡에 둔 보석함을 꺼내 열어 내용물을 닳도록 만지작거린다. 세상을 더듬거리는 손과 눈에 날개를 달아 자유를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 어깨를 쓰다듬어준다. 무한 반복되어 자칫 의미 없어 보이는 매일에서도 자라고 나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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