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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Jun 09. 2023

자아실현이 뭐 별건가요?

스스로 만족하는 법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한 지 열흘 하고도 삼일이 지나간다. 감각하는 세상이 달라졌다고 느낀 건 도착한 지 단 하루만이었다. 숨통을 뚫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에 충분했다. 마음 곳간을 환기하는 일이 얼마만일까.



그동안 세상에 좀 무뎌지고 물이 빠진 인간으로 나를 바라봤었다. 어떤 것을 봐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퇴색한 사람이었다. 발 벗고 나선 세상의 이음이 아닌 내 방 천장이 보이게 누워 5인치 액정 속 다른 삶을 구경하는 걸 낙원으로 묘사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좋은 걸 보면 좋지만 그냥 거기까지일 뿐 당장 득이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한 나름 실용적인 인간이었으니까. 그 착각이 좋아하던 것을 문질러 으깨고 있었다는 것을 멀리 떠나온 이곳에서 알았다. 나는 여전히, 마치 날 때부터 취향을 타고난 듯 분홍색에 열광하고 자연이 주는 무해함을 향유하는 사람이었다.



무채색을 고집했던 그간은 어딜 가나 있을 법한 그렇고 그런 존재로 눈에 띄지 않게 섞이고 싶었던 바람이었다.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사람의 욕구 같은 것이랄까. 꽤 과감하고 실험적인 형태와 빛깔을 사랑했던 시간들이 뜨거워진 이마로 바람에 묻어왔다. 희석되었던 나를 꺼내보게 된 것만으로 이곳에 온 까닭이 선명해졌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를 지닌다. 유한한 삶을 살면서 주체적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바람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넘어지고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시도하기를 반복한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내 목표를 달성해야만 자아실현이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인생에서 일만큼 스스로를 충만하게 만드는 수단은 없다고 단정했다. 미래에 내가 그토록 그리는 사람이 되었을 때 오롯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찌감치 매듭지었다.



확고한 신념을 우습게 뒤집은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수고의 흔적이 묻어있는 작품들에서, 초록잎이 전해주는 이유 모를 편안함에서, 해 질 녘 도로 위는 식어가고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드는 시간 앞에서 그 자리 그대로 묶여버릴 때 알게 됐다.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대상에 쉬이 마음을 내놓는 모습을 보며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가진 진심값을 다하는 매무새였다고 자명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건 곧 내가 원하는 자아를 실현하고 있었던 순간이 아닐까.



자아실현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하나의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던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학자마다 해석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큰 맥락은 비슷하다.



저마다의 삶이 담긴 작품을 소수 할 때 자아실현하는 나.

북마크 해둔 카페에 찾아가서 그리던 코코넛 크림 파이를 맛볼 때 자아실현하는 나.

풍경이 바람 따라 춤추고 새소리로 메운 길을 걸을 때 자아실현하는 나.


모든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존재론적 자아를 느끼고 실현할 수 있는 도구들이었다. 성대한 꿈을 이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내가 느끼는 모양대로 닿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발 디딘 오늘에 만족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트인 나를 만나는 길이 아닐까. 아직 채 발견하지 못한 보통의 행복을 누리고 써나가는 사전을 만들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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