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연 May 26. 2023

여행만이 줄 수 있는 감각

지금과 영감을 되찾는 시간




옷장 위 먼지가 뽀얗게 덮인 캐리어를 내렸다. 오랜 시간 떠난 적 없음을 알려주는 높이가 쌓여있다. 2년 전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제주도로 도피했던 것을 제외하면 어디론가 떠나는 건 꽤 오랜만이다. 별일 없으면 집에서 보내는 걸 좋아하지만 고정된 모양 그대로 굳어진 일상을 말랑하게 만드는 데에 여행만 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누가 내게 왜 여행을 하냐고 이유를 물어온다면 당장 두 가지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지금을 살 수 있어서이다. 오늘을 살고 있지만 진짜 오늘만을 위해 사는 순간은 하루에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오늘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원하는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는 사람, 다음 주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일하는 사람, 다이어트 혹은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하는 사람, 자격증 취득을 위해 퇴근 후 학원으로 향하는 사람. 적어도 깨어있는 시간 절반은 미래를 위해 소비한다.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드는 날은 되고 싶은 나로 한 발짝 다가갔다는 보람을 느낀다. 분명 필요에 의한 소비지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쥐어지지도 않는 결과물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쓰고 그리는 일은 현재를 충만하게 만드는 조건을 갖추었지만 이 또한 매일이 그런 건 아니다.)



여행만큼 완벽하게 오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 몰두하게 만드는 건 아직까지 만나본 적 없는 것 같다.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느끼는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와 설렘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만들어 낸다. 특히 다른 언어를 쓰는 곳에서 그 진가가 나타난다. 몸소 부딪히고 당하고도 즐겁고 깨달음이 있다는 건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 있어서일까. 이불킥이 정당화되는 어제의 버둥거림도 당장 내일 맞이해야 하는 막막한 현실도 내겐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보단 기억해 내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카페에 찾아가서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맛있게 뚝딱 비우는 게 더 중요하니까. 순간만 누리는 연습의 연장선이 된다.




두 번째는 감사를 되찾고 영감을 더하기 위함이다. 무뎌진 일상에 새로움 한 스푼을 넣었는데 맛이 한층 깊어진 순간이 찾아올 때 인생 전반에 걸쳐 집순이인 사람도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넓고 넓은 세상에 저마다의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내가 가진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오래전, 런던에서 머물며 공부하는 시간이 막바지를 향해가던 날이었다.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나서 허둥지둥 유난히 마음이 바빠진 날이었다.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명제에서는 여행이 사치가 되어 어디로도 가본 적이 없었다. 문득 영국이라고 지칭하는 넓은 땅에서 한 곳에만 머물렀다 가기엔 억울함이 몰려왔다. 지체할 거 없이 바로 땅바닥에 여행지 후보를 늘어놓고 가장 궁금했던 스코틀랜드를 골라 잡았다. 교통비와 숙소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수도인 에든버러까지 가는 나이트 버스를 예매하고 짐을 꾸렸다. 결정을 내린 건 타지 생활이 막을 내리기 딱 한 달 전이었다. 나에게 스코틀랜드는 언니와 여행 중 우연히 들어간 빈티지 숍에서 보물찾기 하듯 발견한 타탄체크 스커트의 나라였다. 따듯하고 도톰한 소재의 원단 위 검정과 녹색 체크로 이루어진 스커트 안쪽 라벨에 'MADE IN SCOTLAND'라고 쓰여있었다. 좋아하는 타탄체크가 이 나라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화 속의 낭만으로 엮인 나라였다. 돌길 위 근사하게 지어진 성이 있고 마차가 다니는 미지의 곳이었다.



아침 해도 눈 뜨지 않은 시간, 구불구불 어두운 길을 9시간 넘게 달려 도착해 숙소에 대충 짐을 풀고 밖으로 나섰다. 작은 지도 하나를 들고 거리를 누비는 내 모습은 세상을 처음 맞이한 5살 어린아이와 같았다. 옮기는 걸음마다 내적 흥분으로 들끓었다. 체크 패턴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부터 나보다 몇 곱절의 연식이 있어 보이는 인형이 빼곡한 장난감 박물관, J.K. 롤링이 매일같이 해리 포터를 집필했다는 카페, 해괴하고 난해한 물품이 가득한 빈티지 숍, 생각보다 웅대한 에든버러 성까지 걸어가는 길의 풍경들 모두가 그러했다. 내가 느끼는 다채로운 빛깔의 정서를 함께 나눌 이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중에서도 눈이 가장 똥그래지는 순간은 타탄체크 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족히 2m는 돼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 역사 교과서 속에서 본 것 같은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입은 남정네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공간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살면서 몇 번 볼까 말까 한 흔치 않은 풍경이었으니 말이다. 당당하면서도 유순한 애티튜드에서 그 문화가 지닌 본유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은 내게 그런 의미다. 낯선 곳에 나를 책임감 없이 던져놓고 '알아서 당장의 살 길을 찾아라'라고 미션을 주고 잠재된 용기와 직감을 실험하는 일. 하나의 취향만 고수했던 내게 이런 것도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며 나를 편견 없이 열어놓고 발굴하는 일. 이만하면 여행은 가진 시간과 화폐를 지불하는 이상의 값어치를 해낸다고 호기롭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08화 지금 행복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