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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Aug 17. 2023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

현실의 땅에 발 디딘 꿈의 날갯짓



반쪽으로 선명하게 쪼개진 삶을 살고 있다. 살기 위해 사는 삶과 살아남기 위해 사는 삶. 두 개의 삶은 흑백으로 나뉜 극과 극의 구역에서 생활한다. 전자는 나의 본질과 속성에 충실한 일이고 후자는 매일 당위성을 부여해야만 하는 일이다. 전자는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일이고 후자는 나를 먹여 살린다. 전자에는 터럭만 한 잠재적 기질까지 몽땅 끌어오고 싶다면 후자에는 개미 눈곱만큼의 노력을 들여 최대치를 뽑고 싶은 도둑놈 심보가 생긴다. 전자는 늙고 병들어 신체의 섭리가 허락하지 않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라면 후자는 당장 내일이라도 손 털고 나오고 싶은 일이다. 고유의 특성을 가진 두 가지 자아를 상황과 필요에 따라 온오프 작동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가동된 지 좀 오래지만 몸에 내장된 스위치 변환 회로 덕분에 두 개의 트랙을 오가며 달리는 것도 다소 빨리 적응한 편이다.  



두 개의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감각이 살에 닿은 건 얼마 전 일하면서 만난 사람의 말이었다.


유연님은 웃음도 많고 말하는 게 재밌어서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을 것 같아요!



오며 가며 건넨 한 문장의 언어는 가로로 마음을 관통하여 하루종일 몸 안에서 돌아다녔다. 분명 내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나였다. 낯설고 어색해 정면에서 마주하기 오그라드는 사회적 가면을 쓴 나.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말하는 게 재밌고 웃음이 많은 건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낯을 가리면서도 상대를 웃기고 싶은 출처 모를 욕구가 저편에서 자꾸 빈번하게 솟구친다. 잘 웃는 사람이라고 봐준 건 처음 봐서 어색하거나 어려운 자리일 때 냅다 웃음으로 위기를 모면해 온 관성적 습성 때문인 것 같다. 마음에 턱 하고 걸려 소화되지 않는 구절은 두 가지. '친구가 많다'와 '인기가 많다' 이건 다음 생에서나 굳게 맘먹고 운이 따라야 가능한 일일 텐데 속으로 찔렸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20대만 해도 그렇게 보이고 싶어 겉치장을 했었다. 돈이든, 외모든, 친구든, 심적 여유든, 미적 감각이든 남이 봤을 때 좀 넉넉하고 있어 보이는 것. 그때의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거품을 걷어내고 그 안의 나를 볼 줄 아는 본질의 눈이 생겼다. 내 마음 하나 편히 사는 게 제일이라고 몸 부딪히며 체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좌우간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현재의 나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건 곧 모드를 전환할 때마다 그만큼 큰 에너지 소모가 발생한다는 얘기일 거다. 줄곧 내가 가진 체력적 한계만 의심했었는데 육체적으로 힘이 모자라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임이 이해됐다.



미대로 진학 목표를 삼은 열일곱 겨울방학부터 미술 입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방학 중에는 학교에 나가지 않아 시간과 체력 분배가 할만하다 느꼈는데 학기가 시작하고 각오했던 것보다 더 예삿일이 아니었다. 학기 중의 시간표는 대개 이러했다. 학교 수업을 마친 늦은 5시, 미술 학원으로 곧장 달려가 근처 이삭 토스트로 저녁을 먹고 6시부터 10시까지 그림을 그린다. 11시, 집에 와서 씻고 나와 종일 들볶인 정신을 달다구리로 달래며 학업 모드로 돌아오면 눈 깜짝할 새 새벽 1-2시가 된다. 4-5시간 눈 붙이고 7시 50분까지 등교하면 동일한 하루가 반복된다. 두 영역을 가로질러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발을 담갔다 뺐다 하다 보니 정신의 깃을 꼿꼿이 세워야 하는 하루 시작이 여러 번이었다. 다들 어떻게 이렇게 해왔던 거고 하고 있는 걸까?, 하원하는 버스 안 목이 뒤로 꺾여 넘어가는 친구를 보며 생각했다. 재수 1년을 포함해 인생에서 가장 얄궂고 빡빡했던 4년. 그렇게 그림 그리는 나와 공부하는 나 두 가지 모드를 병행할 수 있는 일신으로 단련됐다.



20대 중반, 학교는 나와 안 맞는다며 내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두 번째 양분화된 삶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열정, 감각, 인내 모든 요소가 중요했지만 작업을 부양하기 위한 돈이 제일 필요했다. 작업하는 삶과 작업을 이어가기 위한 삶. 이미 한 번 체화했던 몸은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첫 번째 이분법적 삶과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맥락은 비슷했다.



30대 중반, 다시 쪼개진 삶으로 돌아왔다. 오전은 오롯이 존재하는 자아로 읽고 쓰고 그리다가 오후가 되면 본질의 의식 스위치는 꺼두고 생계형 생활자 모드가 된다. 어느 순간 니체가 내세운 「영겁회귀」 사상이 떠올랐다. 삶이 아직 끝나지 않고도 이 작은 생의 주기 안에 그 개념이 들어온 건가 신기하기도 했다. 흘러가는 시간도, 인생도, 내 마음도, 내 몸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서 그저 그가 말한 대로 순간을 가치 있게 보내는 게 답이 아닐까 생각했다. 꿈과 현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저울 위에서 새롭고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삶. 하다 보면 두 개의 트랙이 하나로 합쳐지는 날이 오겠거니 기다리며 절망보단 그래도 희망의 트랙에서 나아가는 삶.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주어진 삶에 양껏 표할 수 있는 배려이니까.  



뜨거웠던 아스팔트가 채 식지 않은 후덥지근한 7월의 늦은 10시, 뮤지컬을 하며 배우의 꿈을 꾸는 동료와 발맞춰 걸었다. 그는 이야기했다. 지금 비록 돈이 나오는 곳에 자기 대부분의 노동력, 시간, 정신적 수고를 팔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꿈이 흔들린 적 없다고 까랑까랑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위한 일을 하면 할수록 외려 지켜내고 싶은 일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공고화된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해. 뜻을 거스르려고 한 순간 눈치 빠른 삶은 그새 알아차리고 힘없이 허물어지거든.



나는 위아래로 세차게 고개를 네 번 끄덕이며 "응응 맞아 맞아" 동의했다. 샛노란 색종이를 오려 붙여내 만져질 것만 같은 달이 비추는 밤, 도란도란 거리를 채운 희망으로 우리는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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