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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산 Oct 29. 2022

일그러진 싸움의 끝

그런 교수 밑에서는 배울 게 없다

1) 편지 한 장의 감동


졸업할 때가 되면 누구나 진로를 고민한다.

취업이 확정된 친구들은 좋겠다. 나는 병역특례 업체에 지원했지만, 오라는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취업소식만 기다리는 부모님 생각이 떠올라 우울했다. 그러나 길은 있다.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학자가 되는 길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말한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래! 대학원에 가자!

그러나 문제는 반올림해도 2.7밖에 안 되는 내 학점이 문제였다. 학점이 형편없는데, 나를 받아 줄까? 고민 끝에 모든 교수님들께 간절한 손 편지를 썼다.


사은회가 열렸다. 몸도 마음도 추웠다. 선배들은 선생님들께 술을 따라드리고 한 잔씩 받아 마시며 즐거워했다. 선생님들이 이제 고만하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다 받아 놓으시고 한 잔씩 따라 주셨다. 얼마 후 얼큰해지신 박 교수님이 두리번거리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내가 부임한 이후, 학생한테서 편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자~ 어디 있니?”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리 와라. 내가 술 한 잔 주마.”

내게 손짓하셨다.

“그래, 대학원에 오고 싶다고? 그럼 와야지! 학점 걱정은 하지 마라.”

박 교수님은, 다른 교수님들께도 편지 내용을 이야기를 하시면서, 감격스럽게 칭찬하셨다. 감격이었다. 말 그대로 몸 둘 바를 몰랐다.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면접 날, 또다시 고민이 밀려왔다. 내 초라한 성적표를 보고 뭐라고 하실까? 떨어져도 할 말이 없다. 면접장으로 들어서는데, 다른 교수님이 갖고 있던 성적표를 박 교수님이 뺏어 들으셨다.

“공부도 잘했네. 이 정도면 됐지.”

그리고는 또 한 번 더 내가 보낸 편지 이야기를 감격스럽게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아껴 주셨다. 대학원에서 힘들고 지쳤을 때도 그리고 내가 교수가 된 지금까지도.

교수님 덕분에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2) 그런 교수 밑에서는 배울 게 없다


여름 방학에는 하계 학술대회가 열린다.

여러 대학의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참여하여 분과별로 준비한 논문을 발표한다. 논문 발표와 질의응답까지 20분이면 되지만, 발표자에게는 그 시간이 그리 길 수 없다. 그해 여름에는 대전에서 학회가 열렸다. 선배들의 분야별 발표가 순조롭게 잘 끝나고 회식 자리가 이어졌다.

“그 친구 한 방 얻어먹었지.”

“허허허.”

발표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영웅담처럼 들린다. 술잔이 한참 오가고 선생님들이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하면 테이블의 자리가 하나둘씩 번갈아 비기 시작한다. 밖에는 선배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 부족한 연구 장비에 대한 불평이 많았다. 출장비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교수님들은 2박 3일 출장비를 받으셨는데, 우리에게는 차비만 주고.”

회식이 끝날 무렵 마주 앉아 있던 지도 교수님이신 안 교수님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셨다.

“여기 식사비는 너희들이 내라. 알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옆으로 홱 돌아앉아 버렸다. 

회식비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늘 우리들이 내왔다.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이 저런 말씀을? 출장비도 두둑하게 받아 오신 교수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다니, 어이가 없었다. 

나를 보고 놀라신 신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며 말씀하셨다.

“여긴 내가 낸다.”

나를 늘 응원하시던 박 교수님도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 순간, 아차 싶지만 이미 늦었다.

‘아~ 내가 도대체 뭔 일을 벌인 거지?’

회식이 끝나고 식당 앞에 줄을 서서 선생님들께 인사를 했다. 차례로 악수하며 나오시던 안 교수님은, 나를 못 본 듯이 건너뛰고, 다른 친구에게 손을 내미셨다. 나는 말 그대로 찍혀버렸다. 교수님은 그 후로 나를 찾지 않으셨다. 우연히 지나칠 때도 못 본 척하셨다.

교수님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실수를 만회하려면 내가 할 일은 연구밖에 없었다. 2학기 내내 그리고 겨울방학에도 추운 연구실에서 전기장판도 없이 먹고 자고 연구만 했다. 석사 3학기가 되면 누구나 학과 조교를 했다.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교수님의 화가 풀리지 않으셨다. 조교 자리는 후배에게 돌아갔다.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내게 원서 한 장을 내미셨다. 공군 장교 지원서였다.

“그런 교수 밑에서는 배울 게 없다. 당장 집어치워!"

아버지의 말에 가슴이 미어져 왔다. 대학원에서 큰 공부를 하고 있다고, 우리 집안에 곧 박사가 나올 거라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한동안 잠을 이루 수 없었다. 

장교 지원서를 찢어버렸다. 

언젠가 알아주는 날이 오겠지.


그다음 해 하계 학술대회는 마산에 있는 경남대학교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논문이 준비된 선배가 한 사람도 없었다. 한 선배가 발표자로 나를 추천했다. 지난해의 악몽이 떠오른다. 이제 교수님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나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작성하는 논문이라 그런지 예상되는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막판에 박사과정 선배가 도와주어 발표 하루 전날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3개월 동안을 하루 걸러 하루씩 잠을 자며 이뤄낸 결과였지만, 맘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다.

밤차를 타고 학술대회가 열리는 마산에 도착했다. 선생님과 다른 친구들은 하루 전날 도착해 있었다. 꾀죄죄한 내 모습을 본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친구는 내게 구두를 벗어 주었다.

다른 친구는 와이셔츠와 넥타이도 벗어 줬다.

나는 완전히 그로기 상태였다. 어떻게 발표했는지도 모른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던 동안, 내가 쥐고 있던 지시봉이 칼춤 추듯 떨렸다고 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교수님 차례다.

이제 날 인정해 주시겠지.


3) 너는 왜 박사과정에 들어오려고?


석사학위 논문이 완성되고 이제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즌이 되었다.

제어연구실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지도교수님이 내게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네가 왜 박사과정에 들어오려고?”

할 말이 없다. 다 잊고 용서해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박사과정 시험에 응시했는데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이름이 하나 보였는데, 그 사람은 나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현직 전문대학 교수였다.

“너는 영어시험 점수 미달로 탈락했다더라.”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진짜 매몰차고 비정한 선생님이다.


얼마 후 국가에서 실시하는 석사장교 선발 영어시험에 합격했다. 석사장교는 4개월간 훈련받고 전방 부대에서 2개월간 소대장 실습을 거쳐 소위 계급으로 제대하는 병역특혜 제도였다. 장교가 된다는 말을 들으시고 부모님께서 크게 좋아하셨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시다.

내가 그렇게도 미우신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다.

나는 꼭 박사과정에 들어갈 거다.


4) 싸움의 끝


군 복무를 끝낸 1985년 봄이다.

학교 연구실에 들렀다. 그 사이 연구실 선후배들이 늘어났을 뿐 대부분 그대로다. 내 자리도 그대로 있다. 박사 입학시험은 10월에 있다. 그때까지 할 일이라고는 내 연구를 하고, 후배들을 도와주는 일 밖에 없다.

“인마, 지금 그걸 발표라고 하고 있는 거야?”

후배들 혼내는 재미로 살았다. 얼마나 괴롭혔는지 어느 날은 세미나 시간이 다 되었는데 후배들이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니 다른 방에서 몰래 모여 세미나 대비 발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세미나가 있는 날 저녁에는 무조건 학교 앞 치킨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이후로 내 후배들은 모두 술꾼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지도교수님이 부르셨다.

“내가 많이 바쁘다. 후배들 논문 쓰는 거 네가 좀 도와줘라.”

감격이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부탁의 말씀이었다. 제어공학 분과 학술회의에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들은 대부분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그 다음날 지역 일간지에 학술발표 소식이 실렸다.

‘학술회의에서... 안 교수팀의 연구발표가 눈길을 끌었다.’

선생님이 만족하신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계셨다.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앞둔 어느 날, 지도 교수님이 많은 후배를 모아 놓고 큰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이눔아~, 올해 내 인생의 최대 목표는 너를 박사과정에 입학시키는 거다. 자~ 다들 한잔하러 가자.”

후배들도 모처럼 자기 일처럼 즐거워했다. 

선생님과의 긴 싸움이 그렇게 끝났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교수님은 제어연구실의 모든 일에 대해 내게 의견을 물으셨다. 우리 연구실은 늘 지원자가 많이 몰렸는데, 누구를 받고 누구를 떨어뜨린 것인가 하는 것도 내가 결정했다. 탈락한 학생이 교수님께 애원해도 내게 먼저 허락받아야 한다고 돌려보내셨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결정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셨다.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뜻하지 않는 실수를 하게 된다.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해해 주겠지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사람에게 남긴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한다. 나는 한 번의 실수로 30개월 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지도교수님도 30개월 동안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셨을 거다. 실수를 깨달으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처가 불어나기 전에 즉시 사과를 해야 한다. 

나는 요즘도 연말이 되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저질러온 실수가 없었나 자문해본다. 그리고 모임자리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내 진심을 말한다.

"혹시나 제가 한 실수로 마음이 아픈 기억이 있다면 미안합니다. 마음에 묻어둔 상처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말해주세요. 지금 말하지 않을 거라면 영원히 잊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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