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모가 내게 알려준 선물
생각만 해도 언제나 마음 아린 고향집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방 문을 열어젖히고 연신 손짓을 하며 반가워하신다. 사랑채에서는 할아버지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시고, 방 밖으로 한 발을 내 디디시며, 추우니 어서 들어오라고 하신다. 할머니는 선반에서 홍시와 곶감을 꺼내시고, 할아버지는 사랑채에서 호두를 박스 채로 들고 오셨다. 등잔불 밑에서, 할아버지가 화로에 고구마를 구우시며,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대학교는 잘 다니고 있냐고 물어보고 또 물어보신다. 마루에 걸려있는 호롱불이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누가 왔나 보네~”
옆 동네로 마실 다녀오던 윗집 아저씨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고모 보고 싶지 않니?”
오늘도 할머니께서는 시집간 고모가 어찌 사는지 궁금하신가 보다. 셋째 고모를 보러 가기로 했다. 할머니도 가보고 싶어 했지만 눈길이 미끄러워 나 혼자 가기로 했다.
“여보, 누가 왔나 봐 봐.”
마당의 눈을 치우시던 고모부가 큰 소리로 고모를 부르셨다. 부엌에서 고모가 환한 얼굴로 달려 나와 내 손을 잡고 비벼 보신다.
“아이고, 얼음장이네. 지금 버스 올 시간이 아닌데 산길을 걸어왔니?”
방 아랫목에서 이불을 둘러 주시더니 조금만 기다리라 하신다. 얼마 후 부엌에 들어가니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큰 목욕 물통이 보였다. 고모가 내 등을 밀어주셨다.
다음 날 고모가 조용히 내게 물어보셨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한 번이라도 선물해 본 적 있니?”
고모의 말씀이 마른번개가 되어 내 뇌리에 박혔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선물을 해 본 기억이 없다.
나는 늘 받기만 했다.
부끄럽다.
“네가 주는 선물을 받으면 정말 좋아하실 거야.”
고모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선물을 사서 드려보라고, 꼬깃꼬깃한 용돈을 내게 쥐어 주셨다. 버스를 타고 읍내로 달려갔다. 털실 장갑과 가죽 장갑을 샀다. 약주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가 생각나 소주도 한 병 샀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가죽 장갑을 끼고, 동네 할아버지들께 자랑하러 다니셨다. 할머니는 집에서만 털실 장갑을 끼셨는데, 잘 보이는 안방 벽에 걸어 놓고 좋아하셨다.
'고모, 고마워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선물을 받았어요!'
고모가 아니었으면 할머니 할아버지께 한 번도 선물을 드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모는 훗날 병원에서 투병을 하시다가 임종을 하시기 전에 시신기증을 서약하셨다. 마지막 날에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고귀한 선물을 남기고 떠나셨다.
2) 할아버지의 고지백이 인생
어느 여름방학, 마침 장날이어서 읍내가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장날은 축제가 열리는 날처럼 보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볼 것도 많고, 약속하지 않아도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동네 어른들도 보이고 형들도 보인다. 오랜만에 둘째 고모부를 만났다. 한잔 취하셨는지 목소리가 커지신다. 고모가 보고 싶지 않으냐고 몇 번을 물으신다. 보고 싶지만, 오늘은 집으로 가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샀기 때문이다.
시골집으로 가는 버스 막차는 늘 만원이다. 끼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힘들게 서 있지만,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나면 좀 숨통이 트인다. 앞쪽에서 귀에 익은 얼큰한 음성이 들렸다. 전에 다니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인사를 하니 누군가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아~ 너 대학교 다닌다고 했지?”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다가 뭔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야~ 이 녀석들아 여기 좀 봐라.”
버스 뒤쪽에는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선생님의 큰 소리에 졸고 있던 학생들도 뭔 일인가 궁금해하며 쳐다봤다.
“이 대학생 형만큼 만 공부를 해봐라.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안 가고, 수업 시간에 오줌 싸가면서 공부했다.”
선생님 말씀이 자꾸 꼬이신다. 학생들이 키득키득 웃고 난리다. 버스 기사님도 으하하 웃었다.
선생님 덕분에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내일이면 청양신문에도 날지 모른다. 내가 진짜로 할아버지의 전설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저녁에 할아버지께 술을 한잔 따라 드렸다. 할머니가 몸이 불편하신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네가 장가가는 것 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을 텐데.”
할아버지가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핀잔을 주셨지만, 할머니는 계속 말을 이어가신다.
“내가 죽으면 우리 집이 잘 보이는 앞동산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야 손자들이 힘 안 들이고 보러 올 수 있지.”
다음 날, 할아버지가 우리 산에 가보자고 하셨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우리 산이 나온다. 할아버지도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신 것 같다. 산에 오르는 중간중간 고지백이에 앉아 쉬시면서 할아버지의 긴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베어내고 남은 뿌리 부분인 그루터기를 고지백이라고 했다.
"사람은 죽어서도 고지백이처럼 되어야 하는 거야.
나무꾼에게 이렇게 쉴 수 있는 자리를 내어 주지 않니? 세월이 지나면 관솔처럼 좋은 땔감이 되어 주지. 이 할아비는 세상을 어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나도 이 고지백이처럼 되었으면 좋겠는데..."
할아버지의 눈가에 글썽글썽 눈물이 맺혀있다. 산꼭대기에 오르자, 산 아래 멀리 보이는 동네 어귀를 가리키신다.
“저기가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야. 버스도 보이고 걸어오는 사람도 보인다. 나는 이 산이 정말 좋다. 내가 죽으면 이 산에 묻힐 거야. 그래서 손자들이 멀리서 오는 모습을 제일 먼저 보고 싶단다.”
할아버지는 가난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일자무식으로 살아오셨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아니에요!
고지백이를 가르쳐 주시고, 내게 인생의 큰 의미를 가르쳐 주셨어요!
신비한 전설도 만들어 주시고 들려주셨잖아요!
훗날 할머니는 돌아가셔서 집이 내려다보이는 앞동산에 묻히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할아버지는, 할머니 곁에서 사과를 깎아 입에 넣어 주면서, 마른 눈물을 보이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1년 후 추운 겨울에, 할아버지는 우리들의 수호천사가 되셨다. 할아버지는 소원대로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묻히셨다. 지금도 고향을 찾아 동네 어귀를 돌아들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 계실 거다. 할머니가 묻히신 동산 아래 정자나무 그늘에서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신비한 전설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