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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산 Oct 29. 2022

아내의 가슴에 깃든 사랑

출산과 아내의 간절함

1) 아내의 가슴에 깃든 사랑


신혼여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에서 할아버지 제사가 있었다.

아내가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시골의 모습이 아내의 눈에는 어떤 모습으로 비쳐 보일까? 부엌에는 흐릿한 전구 하나가 달랑거리고 있다. 큰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어오르고 아궁이에서는 가끔 매운 연기가 새어 나온다. 겨울을 나기 위한 장작과 솔가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게 익숙한 풍경이다. 부엌 천장에 붙어 있는 그을음도 예전 그대로다.

저녁 식사를 끝내면 잠시 쉬는 시간이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은 이미 다 마련했고 늦은 밤이 되었는데도 제사 지낼 기미가 안 보인다. 언제 제사를 지내나 아내가 궁금한 눈치다. 밤 11시가 넘어야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제사상이 차려진 안방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방이 비좁아 어린아이들은 마루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유~ 세차~”

아버지가 축문을 일기 시작했다. 아내가 놀랐는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오밤중에 큰소리로 유세차를 하고, 잔을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하고, 줄지어 방을 들락거리며 절을 하고 또 하는 모습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다. 처가의 제사상은 이른 저녁에 간단히 차려진다. 제사상에는 한자로 된 지방 대신에 사진이 올려있다. 제주가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축문은 준비하지 않는다. 절하고 싶은 사람을 절을 하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신 기도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다들 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마음으로 고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시간으로 축문을 대신한다.

아내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영혼이 부활하여

자신의 가슴에 깃들어 함께 산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의 가슴에는 따뜻한 장모님의 사랑이 온전히 깃들어 있다.


2) 아내의 눈물


결혼 후 엄마를 어머니로 불렀다.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먼 것 같다. 그래도 어른이 되었으니 뭔가 바뀌는 게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랬다. 우리는 가난하게 출발했다. 나는 신혼여행 때부터 아내에게 부탁했다.

아무리 돈이 없고 힘들어도, 절대 기죽지 말고 당당하라고.

내 수입은 몇 푼 안 되는 대학 강사료가 다였다. 대학원 등록금은 부모님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모님께 손 벌릴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도 없었다. 선후배들의 결혼식 날이 우리가 외식하는 날이었다. 축의금을 많이 낼 수 없어도 늘 아내와 동반하여 참석했다.

아내는 나와 다짐한 대로 늘 기죽지 않고 씩씩했다.


어느 날 밤 누군가 울고 있는 슬픈 꿈을 꾸었다.

깨어보니 아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생각났다고 했다.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결혼 전에는 안 해보던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해야 하니 많이 힘들었을 거다. 더구나 장남에게 시집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했으니 맘고생을 짐작할 만하다. 내 마음도 아팠다.

“내일 장모님 뵈러 가자.”

마음만 아플 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측은한 아내의 눈물을 보니 빨리 졸업하고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아내에게 신경 쓸 시간이 점점 더 없어졌다. 아내도 많이 힘들고 피곤했을 거다.

그때는 미쳐 그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다.


3) 출산과 아내의 간절함


아내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 입었던 손수 만드신 배냇저고리를 보여 주셨다. 30년 정도 되었는데 아직도 소중하게 갖고 계셨다. 태어 날 아이의 옷과 신발을 장만하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 평소에는 백화점 가는 것이 힘들고 꺼려졌다. 그날은 여기저기 아가 용품점을 돌고 돌아다녔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내 얼굴만 한 아기 옷과 내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 신발을 보면서 신기하고 너무 행복했다. 나비와 꽃이 달린 모빌과 몇 가지 장난감도 미리 샀다.

이걸 언제 갖고 놀게 될까?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아빠를 부르고, 아장아장 걷고, 장난감을 갖고 노는 꿈을 꾸었다.  좀 더 크면 가방 메고 씩씩하게 학교도 가겠지. 생각만 해도 흐뭇해진다.


아내가 진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만 시간이 길어졌다. 의사가 초산이니 좀 더 자연분만을 시도해보다가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가 뭔 일 생기는 거 아닐까? 제발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으이 씨, 너 때문이야.”

아내가 내게 소리를 질러 댔다. 한걸음에 달려오신 덩치 큰 장모님이 버럭 화를 내셨다.

“아니, 시간이 길어지면 수술을 해서 낳게 해야지 뭐 하고 있어?”

내게는 분만실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고통 소리만 들렸다. 한참 후 분만실이 조용해졌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후 간호사가 나왔다.

“아들입니다. 축하합니다. 산모도 건강합니다.”

옆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내게 하는 말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기는 더 이상 낳지 않을 거야. 너무 힘들어.”

옆에 계신 장모님의 목소리가 커지셨다.

“사돈, 이제 맏며느리 역할을 다 했죠?”

어머니가 손뼉을 치시며 싱글벙글하신다. 그 후로 장모님은 우리 집에 자주 방문하셨다. 미역은 물론 어디서 구했는지 살아서 펄펄 뛰는 엄청나게 큰 가물치도 들고 오셨다.

그리고 3년 후 둘째를 출산했다.

"옆에 있던 산모는 나보다 먼저 분만실에 들어갔거든? 그 산모 엄살이 어찌나 심한지 선생님께 한참 혼났어. 난 잘 참는다고 칭찬받았어. 이번엔 소리도 지르지 않고 꾹 참았어. 그 산모는 아직 분만실에 있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아내의 힘든 얼굴에 예쁜 미소가 가득 번졌다.


큰아이의 이름을 진홍, 작은아이의 이름은 진혁이라고 지었다. 내가 보아온 사람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우리 아이들도 그 사람들처럼 그렇게 멋지게 살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세상에는 닮고 싶은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 아이들도 닮고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닮고 싶은 그런 사람으로 잘 성장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내 배냇저고리를 손수 만드셨고, 그것을 30년 동안 소중하게 보관하고 계셨던 어머니도 그렇게 간절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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