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하슬라를 데려가게 해주세요."
비를 내리는 의식을 치르러 가는 길에 하에라는 하슬라를 데려가기를 원했다.
"안되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궁금하구나."
바론은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를 띠며 하에라에게 물었다.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하슬라를 데려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나보다 편할 것 같아서요."
"그럼 하슬라에게 네 시중을 들게 하겠다는 말이니?"
"편한 사람이 옆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 아버지."
바론은 조금은 놀랐지만 하에라의 활짝 웃는 모습에 곧 마음이 풀려 버렸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아무래도 힘든 여정일 테니 네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겠지."
바론은 하슬라가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에라에게 하슬라가 도움이 된다면 힐조의 생각도 바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번 의식에 바론과 무들은 동행하지 않았다. 바론은 그동안 지켜본 결과 하에라가 충분히 혼자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더군다나 아란과 하슬라가 동행하는 길이니, 안심하고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힐조는 하슬라가 동행하는 것이 꺼림칙 했지만 제 위치를 정확히 각인시켜 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길게 이어진 나팔 소리에 아란이 먼저 출발했고 하에라가 탄 말이 뒤따랐다. 앞을 바라보며 하에라를 신경 써야 하는 아란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 뒤쪽을 향했다. 말을 탈 줄 몰라 걸어가야 하는 하슬라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말을 탄 자신에게는 먼 길이 아니었지만, 성 밖을 나가 본 적이 없는 하슬라에게는 멀고도 험한 길이 될 것이었다.
하에라는 아란의 뒷모습을 쫓으며 평안한 마음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자꾸 뒤를 향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하슬라를 보는 아란의 얼굴은 환해졌다가 그늘이 지기를 반복했다. 하에라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만 따르던 강아지가 다른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며 쪼르르 달려가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슬라는 아란의 우려와는 달리 성밖을 나간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인간세상에서 성안으로 들어온 이후로 하슬라는 성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큰 길을 따라 행렬을 환호하는 사람들 너머로 울긋불긋한 벽돌로 지어진 집이 늘어서 있었다. 그 집 창문가에는 색색의 꽃들이 심겨 있었고, 그 너머로도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흙먼지가 신발을 뒤덮여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구경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의식을 치르고 성으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바론에게 세상 구경을 하게 해달라 부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번에 거절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슬라는 시무룩해하는 대신 쉬지 않고 고개를 두리번대다 아란과 눈이 마주쳤다. 비록 그가 하는 말은 들을 수 없었지만, 하슬라는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 더 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아란이 안심하고 제 할 일을 할 수 있길 바랐다.
별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익숙하게 할 일을 해 나갔다. 하슬라만이 낯선 곳에서 두리번대고 있을 뿐이었다.
"하슬라! 뭘 그렇게 두리번대고 있어? 넌 내 시중을 들어줘야 하잖아."
날카로운 하에라의 목소리에 하슬라가 달려와 그 뒤를 따랐다. 옆에 있던 아란은 저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바론도 없는 이곳에서는 하에라의 말이 절대적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게 해서는 안 되었다.
"점심 식사를 먼저 올릴까요?"
"당연한 걸 왜 물어? 내가 일일이 명령을 내려야만 하겠어?"
"죄송합니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란의 온 신경은 하슬라에게 향해 있었지만 임무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혹시 오시는 길이 불편하셨습니까? 안색이 안좋아 보이세요."
"아니야, 아란. 네가 길을 잘 인도해 준 덕분에 편안하게 왔어."
"하지만……."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하슬라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이마에 매달린 송골송골 땀방울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왜 한 사람 것뿐이야? 아란 건 안 가져왔어?"
하슬라는 당황하여 아란을 쳐다봤지만 아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는 병사들과 먹겠습니다. 여기서 먹는 건 안 되는 일입니다."
"같이 먹자. 아란. 혼자서는 심심하단 말이야."
"그러면 하슬라와 같이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본분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알았어. 그럼 혼자 먹을게."
하에라는 뾰로통한 얼굴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김이 나는 스튜는 한 눈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슬라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쳤지만 하에라가 다 먹을 때까지는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했다.
"아란은 나가봐도 좋아."
하에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에도 아란은 한참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하슬라의 창백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아란의 시선을 하에라는 꾹꾹 눌러 참으며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에라가 비를 내리게 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단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 하는 일은 매번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일이었다. 숨을 몰아쉬다 목을 턱하고 막을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하에라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곧 성인이 되는 하에라였지만 언제나처럼 이 일은 버거웠다.
아란은 하에라를 두 팔로 번쩍 안아서 제단을 내려왔다. 훈훈한 온기로 가득한 그녀의 침대에 하에라는 눕힌 아란은 방을 나가지 않고 그대로 침대맡에 서 있었다.
"하에라는 비를 내리고 나면 매번 이렇게 쓰러지는 거야?"
"응, 폐하께서도 이렇다고 하셨어. 온몸에 있는 힘을 모조리 쏟아내는 일이라고."
"폐하께서도?"
하슬라는 어렸을 적 바론에게 비를 내리게 해달라 간청한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아버지는 이렇게 힘드셨겠지. 하슬라는 하에라가 점심 식사로 예민하게 굴었던 일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앞두고 평온한 마음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일 것만 같았다. 사실 하슬라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 안의 온 힘을 모아내고 살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어떨지. 그녀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은 거야?"
그런 하슬라를 보며 아란이 급하게 옆으로 다가왔다.
"아니야. 하에라가 안쓰러워서 그래. 앞으로도 이런 고통을 계속 겪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렇기에 이 자리에 더욱 힘들고 어려운 자리라는 걸 잘 아는 것 같아. 하에라는."
"서 있지 말고 옆에 와서 앉아."
하슬라는 의자를 가져와 제 옆에 가져다 놓은 다음, 하에라의 이마에 얹어져 있던 수건을 갈아주었다. 하에라가 '끙'하는 신음을 내며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뜨지는 못했다. 귀밑으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슬라는 정성스럽게 그 땀을 닦아주면서 하에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밉다면 미운 자매였다. 매번 하슬라의 자존심을 망가뜨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마음을 들여놓을 수 없게 만든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같이 할 수 있는 나날을 희망하고 있었다.
"하슬라."
아란이 슬며시 하슬라의 손을 잡았다. 고개 숙인 하슬라는 가득 차오른 눈물을 재빨리 숨겼다.
"하에라에게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지금 내 곁에 네가 있어서 좋아."
하슬라는 아란의 옆에 앉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 오는 날 정원에서 보았던 그 따스한 눈동자였다. 그녀는 아란의 손에 깍지를 끼고 그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네가 내 옆에 있어 줘서 나도 좋아. 따스함을 나눠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할 그 모든 것에."
하슬라가 아란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었다. 아란도 그녀의 머리 위로 자기 머리를 살며시 얻어 그녀의 따스함을 느꼈다. 드디어 머물 곳을 찾아다는 듯 둘의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평온한 둘의 한숨이 한데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