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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39화

by 백서향

하슬라는 걷고 또 걸었다. 흙먼지가 일어 신발이 제 색깔을 잃어버렸다.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하더니 통증이 무릎으로 올라왔다. 종아리를 두드리고 허리를 주무르면서 하슬라는 생명의 땅을 바라보았다. 덩굴에 가려 성의 꼭대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절뚝거리기는 했지만 쉬지는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쉬었다 가는 붙잡힐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어깨를 짓누르고 눈 앞을 가리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하슬라 앞에 강이 나타났다. 하슬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물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딱 쓰러지겠다 싶을 때 목으로 넘어가는 강물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었다. 손을 씻고 세수도 하고 나자, 주위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하슬라는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제 몸 하나 누일 공간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인가. 내가 누구인지 들키지 않을 수는 있을까.


하슬라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 마을이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긴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 사람 중 아무도 그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하슬라는 골목골목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 이르자 잘만 한 곳을 찾았다. 다행히 안 쓰는 듯한 헛간을 발견했던 것이다.


집안의 불들이 하나둘 꺼지고 별들이 제빛을 찾아갈 때쯤 하슬라는 구석에 몸을 뉘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뻣뻣해진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다. 그 어느때보다 피곤했지만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결혼하지 않겠다 집을 나선 것, 아란이 하에라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 아니면 아란을 만난 것. 아니었다. 모두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난 것부터 잘못되었다. 차라리 그들이 자신을 죽여줬으면 쉬웠을 것을.

하슬라는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이 맺힌 눈을 감았다.



하슬라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온 성안에 퍼졌다. 제나는 인간 세상에 가서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하슬라의 말을 그냥 넘겨버린 것을 후회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하슬라의 마음을 더 들여다 봐야 했었다. 인간 세상에는 언제 굶주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도사리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가엾은 아가씨.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 떠밀리듯 결혼을 시키려고 했으니,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을 텐데. 제나는 자신이 더 세밀히 보살피지 못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이 일은 전적으로 바론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하슬라를 찾는 것조차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그가 원망스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제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저 하슬라가 잘 지내기를,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아란은 소식을 듣자마자 정원으로 달려갔다. 하슬라가 성을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정원에 숨어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원 어디에도 하슬라는 없었다. 덩굴의 한 귀퉁이에서 구멍을 발견한 아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슬라를 궁지로 몰아 도망칠 수밖에 없게 한 것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그 말은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를 버티게 한 하슬라는 떠나버렸고, 하슬라가 없는 정원은 그에게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벽문을 굳게 닫아버린 아란은 마음이 편해지는 자신을 보며 놀랐다.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게 할 존재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버지를 거스를 수도 그렇다고 하슬라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도 없는 초라한 존재는 이렇게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하에라와의 행복을 바라지도, 그렇다고 하슬라와의 재회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 누구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조차도.



새벽에 눈이 떠진 하슬라는 서둘러 헛간을 빠져나왔다. 혹시나 주인이라도 와서 들키게 되면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일단 길거리로 나왔다. 해가 뜨기 직전이었지만 꽤 많은 사람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하슬라는 하룻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녀는 맛있는 수프 냄새를 따라갔고, 식당을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수프를 먹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앞을 서성이고만 있었다.


"들어올 거야 말 거야?"


식당 주인이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하슬라를 보고 핀잔을 주었다.


"이 걸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식당 주인은 이게 뭔가하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돈을 주고 먹으면 되지. 돈 있어? 있으면 꺼내놔 봐."


하슬라는 옷 안쪽에서 작은 꾸러미를 열어 그중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로도 될까요?"


식당 주인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하슬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 아가씨가 바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응, 응. 그럼 되지. 되고말고."


식당 주인은 망설이지도 않고 하슬라를 식당 안으로 들여보냈다. 식당 안에 있는 손님들도 그 모습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누구 하나 식당 주인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하슬라 앞에 수프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이 놓였다. 크게 숨을 들이쉰 하슬라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배를 곯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성안에 있을 때는 너무도 당연한 것들을 어렵게 구해야 한다는 것에, 하슬라는 인간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허겁지겁 수프와 빵을 먹고 있는 하슬라 옆으로 다가온 식당 주인은 슬며시 빵을 하나 더 놓고 갔다. 아무래도 과한 대가를 지불받은 것이 걸렸던 모양이었다. 하슬라는 그 빵을 짐 가방 안에 넣고 식당을 나섰다. 꾸러미 안에는 작은 보석들이 아직 많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아껴야만 했다.


하슬라는 시장 안을 이리저리 구경하느라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평생을 성안에 갇혀 살다 바깥세상을 보니 정신을 놓고 구경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또다시 밤에 되고 하슬라는 잘 곳을 찾아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달리 이쪽 골목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아침에 보석을 이용해 본 하슬라는 헛간을 찾기보다는 식당 같은 곳에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잘 만한 공간이 있는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골목은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는 어두운 가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하슬라가 말을 걸기도 전해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쫓아내었다.


하슬라는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차라리 어제 그 헛간을 찾아 잠을 자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


하슬라는 짐 가방을 빼앗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소리를 지르고 주저앉아버렸다. 아침부터 쫓아다닌 남자가 어두운 골목에 하슬라가 들어가자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가방을 빼앗았던 것이다.


남자는 가방을 거꾸로 들어 안에 있는 물건을 바닥에 쏟더니 재빠르게 뒤지기 시작했다.


"아까 그 보석들은 어디 있어? 어디다 감춘 거야? 내놔!"


덥수룩한 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올리며 소리를 지르는 남자는 보며 하슬라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석을 뺏기면 큰일이 난다는 것만은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다.


"내놓으라고!"


남자는 하슬라의 팔을 잡아끌어 망토를 벗겨버렸다. 그러자 안쪽에 매달아 놓은 꾸러미가 바닥에 팽개쳐졌다.


"여기 있구나."


입이 헤벌쭉 벌어진 남자는 꾸러미를 들더니 안에 있는 보석들을 확인했다.


"안 돼요!"


하슬라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 남자를 두 손으로 밀어버렸다. 방심한 남자는 살짝 뒤로 밀렸지만 손에서 보석을 놓치지는 않았다.


"미친."


화가 난 남자는 하슬라는 뺨을 때렸다. 하슬라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꾸러미를 들고 뒤돌았지만, 하슬라는 그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다시 한번 남자를 밀어버렸다.


"이제 그냥 봐주려고 했더니."


두 눈을 부라리며 다가온 남자는 하슬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꾸러미를 쥐고 있지 않은 손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슬라는 그 모습을 보고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그 손을 힘주어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왜 여자를 괴롭혀?"


그는 남자의 손을 잡아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얼굴을 때려버렸다. 하지만 남자는 끝까지 손에서 꾸러미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얼굴을 맞았지만 히죽히죽 웃을 뿐 꾸러미는 그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하슬라는 무릎으로 기어가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손에서 꾸러미를 뺏으려 했다. 하지만 워낙 세게 쥐어진 탓인지 손가락 하나 펴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남자의 다른 손이 하슬라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남자에게 끌려갔다.


"놓으라고. 놓으라고 했다!"


남자를 발로 차 넘어뜨리자, 하슬라가 풀려나왔다. 하슬라는 더 이상 대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 치다가 골목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가 남자의 손을 발로 짓누르자 마지못해 손을 벌렸고 그 틈을 타 꾸러미를 재빨리 빼앗았다. 남자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반대편으로 도망쳐 버렸다.


땅에는 가방에서 튀어나온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라온은 옷가지들을 주워 가방에 넣고 꾸러미까지 깊숙한 곳에 넣은 후 하슬라가 사라진 곳으로 급하게 뛰어가 보았다.


'어디로 간 거지? 이것조차 없으면 어쩌려고.'


하슬라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맞고 있는 그녀를 보자 라온은 눈이 뒤집혀 그녀는 먼저 챙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라온은 하슬라를 찾아다니는 대신 이곳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가방을 찾으러 다시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슬라는 겁을 먹은 나머지 방향도 모른 채 뛰기에 바빴다. 그렇게 하면 뺨을 맞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방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음흉한 웃음을 짓던 그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계속 달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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