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에피소드

中年 中心

by 허니

지난 추석, 모두들 차례를 지나고 난 후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저의 사촌동생과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얘기일까 슬며시 귀동냥해서 들어보니 다름 아닌 명절 음식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둘이 나눈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명절 음식 차리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불필요한 음식도 많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걸 준비하는 여자들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늦게 결혼한 사촌동생은 자기 처와의 관계를 생각해서인지 적극적으로 찬성한다고 합니다.


급기야 전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줄이는 문제를 두고 모두 의견을 제시하는 이른바 ‘공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다시 둘러앉아 모두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숙모는 “이렇게 음식을 차리고 해야 식구끼리 모이고 하는 것이지, 이러지 않으면 모이지 않을 것 아니냐”라고 우려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당신들이 해오던 방식이 혹 깨지는 것 아닌가 하는 박탈감이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하십니다.


아들 녀석의 적극적인 ‘명절 음식 간소화’ 추진에 모든 고모들이 “저 녀석이 곧 결혼할 생각에 벌써부터 자기 여자 고생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미리 수 쓰는 거 아니야?”라고 한 마디씩 합니다. 모두들 한 바탕 웃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아비로서는 은근히 기대가 되는 장면이기는 합니다. 아들 녀석은 맏며느리인 엄마가 직장 생활하랴 명절 때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여자의 일생’을 측은하게 계속 봐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때만 되면 집에 모든 친척이 모이는 것이 싫은 것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많은 얘기들이 오가면서 결국 ‘명절 음식 간소화’ 추진은 발제자인 아들 녀석의 의도대로 성공했습니다. 음식을 줄이고 각각 집에서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 와서 저희 집에서 장만한 상(床)에 올려놓는 것으로 모두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저희 집에서 기본 음식을 준비하되 향후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제 아내가 명절 임박해서 필요한 부분을 서로 SNS에 공지를 하기로 했습니다.


명절 때는 모든 가정들이 그렇겠습니다만 ‘모임’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느 시기를 특정하여 서로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직전의 ‘명절 모임’ 이후 ‘오늘’까지 녹아 있던 자신들의 스토리를 저마다 전개합니다. 이런 자리가 있다는 것은 참 좋다고 좋다고 생각합니다. 커피도 마시고 취향에 따라 차도 마시면서 끊임없이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분주히 오가며 주방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어느 해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어느 명절날부터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TV를 보다가 “주부들은 음식을 만들 때는 진지하고 열심히지만 음식을 먹고 난 후에는 피로감이 밀려온다”는 어느 출연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겠다는 마음에서 주부에게 귀찮은 설거지가 “내 몫이면 어떠랴”생각했습니다. 온갖 그릇과 접시를 닦고 돌아서면 찻잔, 연이어 식혜니 수정과니 온갖 다과에 사용했던 것들이 밀려오고는 연이어 커피 마시던 컵, 과일 껍질들이 몰려옵니다.


처음 해본 설거지라 많이 미숙했지요. 앞치마를 벗고는 한 마디 했습니다. “모두들 주목! 드시고 싶은 건 한 번에 주문하고, 본인이 쓰던 것은 본인이 클리너에게 가져오시오!” 그날 알았습니다. 아내가 많은 일을 했다는 것과 명절 때 여인들의 지난(至難) 한 시간들을 말입니다. 아! 클리너가 궁금하시군요. 설거지 스페셜리스트인 저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어머니 앞에서 하기가 불편한 마음도 있었으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명절 때뿐만 아니라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자주 합니다. 깨끗한 것은 둘째치고 신속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기는 합니다. 저희 집안에 이 문화를 제법 전파했습니다. 가끔씩 만나는 매부는 ‘생존 전략’으로 전환하여 실천한답니다.


저희는 추석 때면 각 집안끼리 '윷놀이 대항전'을 합니다. 일명 사다리 타기부터 시작해서 대진표를 확정하고 예선 리그를 거쳐 준결승부터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짐작하셨듯이 게임이 시작되면 ‘혈투’입니다. 집안마다 대표선수를 내세워 눈앞에 있는 상품들을 흘낏거리며 승리를 다짐합니다. 집에서 꼭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은 사전에 구매하여 놓고는 이날 이것들을 놓고 집안끼리 전쟁을 하는 겁니다. 상품 구매 담당은 숙모가 맡아서 해왔습니다. 마켓에 들를 때마다 모두의 가정생활에 필요하다 싶은 물건들을 1년에 걸쳐 사들이신다고 합니다.


눈앞에 있는 물건 욕심에 안달이 나는 건 윷판에 있는 선수들만이 아닙니다. 말판을 가운데 두고 온갖 훼방꾼들이 서로 견제하는 팀에게 슬쩍슬쩍 거짓으로 ‘훈수’를 두곤 합니다. 스릴 넘치는 역전극이며 아쉬운 패배, 유쾌한 웃음과 여러 얘기들이 윷놀이 판에 쏟아집니다. 해마다 그 재미를 더한 윷놀이는 해마다 가족들에게는 청량제였습니다. 유난히 '모'를 많이 내셨던 숙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그 분위기가 나질 않아 ‘윷놀이 대항전’은 아쉽게도 몇 년 걸렀습니다. 돌아오는 명절에는 ‘윷놀이 대항전 부활’ 추진을 주제로 제가 발제자로 나설까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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