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활동가의 대중파워 형성기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6150명을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가장 먼저 광진구의 미래당 자원활동가들에게 주민참여조례 추진 의사를 밝혔다. 내가 6150명의 청원을 달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미래당 활동가라는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제가 살고 있는 이곳 광진구에서 주민참여조례를 한번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태어나 광진구에서 살아갈 제 아이의 일이기도 하고요”
“6000명이 넘는 주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요?”
“네, 제가 앞장서서 한번 해볼 테니 여력 되시는 만큼 함께 해주세요. 구로구에서 성공시킨 사례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민참여조례의 발의를 위해 90일의 기간 동안 광진구 주민의 2%인 6150여 명의 청원을 달성해야 했다. 청원은 종이에 주민이 직접 작성하는 방법과 온라인 전자서명을 통한 2가지 방법이 있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종이를 들고 다니며 마을 주민들을 직접 만나 청원을 받는 것이었다. 온라인 전자서명은 회원가입과 인증 과정이 복잡하여 문턱이 매우 높은 편이었다.
90일간 목표 청원을 달성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사전 준비를 하고 9월, 10월, 11월 3개월 간 청원에 집중해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 초에는 아이의 출산예정일이 있었다.
나는 전체 계획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실무를 추진해나갔다.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면 할수록 이 일이 정말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150명의 청원을 받아내는 것이 목표인데 이를 위해 사전에 준비하고 진행해야 하는 일의 카테고리가 정말 많았다.
[준비단계 1차 업무 리스트_예시]
1. 행정 진행 : 주민참여조례 행정 프로세스 파악 / 대표청구인 등록 / 조례안 내용 구성하기
2. 광진구 방사능 안전급식 현황 조사 : 서울시 및 광진구 현황 조사 / 방사능 안전급식 조례 서울시 8개 구 조사 / 환경단체 미팅
3. 관련 학습 및 내용 준비 : 시사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등 영상자료 / 관련 서적 / 관련 토론회 자료집 및 속기록 등
4. 연대 단체 섭외 및 각종 자문 : 환경단체 2 / 생협 2 / 학교 2 / 광진구 지역사회 시민단체 2 / 학부모 의견 청취 / 구로구 김희서 의원 미팅
5. 인쇄물 디자인 및 제작 : 안전급식 홍보물 / 슬로건 현수막 / 거치식 배너 / 부착식 가슴띠 / 각종 인쇄물 텍스트 구상 / 디자이너 섭외 및 제작
6. 청원용 물품 준비 : 캠핑용 수레 / 접이식 테이블 2개 / 서명용지, 서명판, 볼펜 등 / 손 소독제 다수 / 각종 홍보물 등
7. 온라인 카페 및 청원 사이트 : 사이트 내용 구상 및 개설 / 한글 도메인 신청 / 디자인 섭외
8. 활동가 섭외 : 미래당 광진구 활동가 섭외 / 광진구 지인 섭외
활동을 하며 느낀 점 하나. 처음 해보는 일은 막상 시작하면 해야 할 일이 점점 더 발견되며 불어난다는 점이다.
‘아, 그거 준비하는 거 별거 있겠어?’라든가 ‘서너 가지만 챙기면 끝나겠나겠다’라는 예상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챙겨야 할 일과 고민해야 하는 일들이 끝도 없이 늘어났다.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캠핑용 수레 하나를 결정하는 데에도 많은 고민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청원용 물품의 부피가 제법 나와서 차량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차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을 했고 두 번째로 고민한 것은 자전거에 수레를 매달아 물품을 싣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동성은 훌륭하지만 적당한 제품이 보이질 않았다. 수레 자전거를 둘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고민을 하던 중, 뚝섬유원지를 찾은 사람들이 캠핑용 수레를 대여해 사용하는 것을 보았고 여러 제품을 검색한 끝에 바퀴가 크고 프레임이 튼튼한 수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 테이블도 가장 가벼운 접이식을 활용하게 되었다.
수레뿐일까? 홍보물 한 장을 얻기 위해서도 많은 문구를 고민하고 사람들과 논의를 해야 한다. 이후 디자이너와의 미팅을 거쳐 시안을 받은 후 홍보물을 제작하고 배송받아 박스를 뜯어보기까지, 이 모든 일들은 그냥 뚝딱 처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도 많이 만나야 했다. 협력을 구하기 위해 환경단체 책임자 분들과 미팅을 잡았고 학교 선생님, 학부모, 교육청, 구청 관계자들과 이메일, 전화, 대면 미팅을 추진했다. 광진구 내 생협들과 시민사회 분들도 만나 주민참여조례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무엇보다도 3개월 간 함께할 팀을 꾸리기 위해 활동가들을 개별적으로 섭외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또한 전반적인 자문을 구하기 위해 방사능 안전급식 주민참여조례를 성공시킨 구로구 김희서 의원께 연락을 드렸다.
“의원님, 안녕하세요. 우인철입니다. 제가 광진구에서 방사능 안전급식 주민참여조례를 추진해보려고 하는데 가르침을 좀 받고 싶습니다. 시간 괜찮으실 때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려도 될까요?”
만나자는 제안에 김희서 의원은 기꺼이 응답해주었고 이후 아낌없는 자문과 함께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주셨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김희서 의원은 미래당 활동가 워크숍에 섭외하여 강연자로 만났던 인연이 있었다. 당시 미래당에서는 선거 공천이 곧 당선인 거대 정당의 사례가 아니라 자력으로 의회 진출을 이뤄낸 정치인을 찾고 있었는데 김희서 의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힘들고 어찌 보면 외로운 과정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해낸다면 정말 보람 있는 일이 될 겁니다. 앞으로 한국정치의 틀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이렇게 지역에서,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며 성장한 사람들이 리더가 될 것이고, 그래서 지금의 과정은 단순히 하나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바꾸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몇 개월 간의 사전 준비를 마치고, 구청에 주민참여조례를 신청하였다. 나는 ‘대표청구인’ 자격을 얻어 이 주민참여조례의 공식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주민참여조례는 청원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을 90일로 정해두었기 때문에 6150명의 청원을 기간 안에 반드시 달성해야만 했다.
‘과연 90일 안에 6150명을 달성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난 준비 과정을 돌아보며 마음을 다 잡았다.
‘이 일은 우리 마을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필요한 일을 간절하게 추진하면 분명 도와주는 분들이 나올 거야. 한 번에 참여해주지 않으시더라도 내 정성으로 그분들을 감동시키자. 매일매일 찾아가고 만나고 진심으로 임하다 보면 결국은 함께 해주실 거야’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처음 거리로 나간 곳은 광진구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건대입구역 근처였다. 주민참여조례 첫날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불러 모은 상황이었다. 고맙게 모여준 사람들을 보며 나는 용기를 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앞장서서 돌파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끌고 온 수레에서 테이블을 펼치고, 안내 배너를 세운 후 홍보물과 청원 용지를 세팅했다.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한 듯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힐끗거렸다. 세팅을 마친 후, 테이블 앞에 서서 인사를 하고 동참을 요청하는 피켓도 들었다.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아이들 급식을 만들기 위해 청원 참여 부탁드립니다. 어린아이들일수록 방사성 물질에 취약한데요, 조례가 있어야 어린이집도 구청을 통한 안전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민 6150 명의 청원이 필요한데 함께 해주실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날의 상황은 생각보다 힘겨웠다. 갈 길 바쁜 시민들은 우리를 휙휙 지나쳐갔다. 가끔 관심을 보이는 듯 쳐다보지만 그것뿐이었다. 우리가 테이블을 세팅해둔 곳으로 먼저와 참여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표청구인의 책임감으로, 부담감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그런데 준비한 멘트는 입에서 꼬이고 맴돌았다. 내가 말을 버벅거리면 사람들이 관심을 접고 지나가버리기도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활동가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거나 거절을 당하고 있었다. 대로변은 차 소리로 시끄러웠고 갈 길 바쁜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나쳤다.
설상가상으로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분이 찾아와 테이블 앞에 서 있는 활동가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활동가는 나를 찾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책임자인데요, 구청에 정식으로 신청하고 진행하는 주민참여조례입니다. 그리고 상가나 행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안요원은 청원하고 있는 모든 물품을 치우라고 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보안요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주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활동가들의 긴장과 동요가 느껴졌다.
보안요원의 말을 들어보니 이곳 백화점 옆 인도는 사유지라서 반대쪽 인도로 건너가서 하라는 것이었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이 넓은 인도가 사유지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자꾸 차질이 생기자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보안요원도 난처해 보여서 알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잠시 모여 활동가들과 상황을 공유했고 우리는 배너와 테이블을 모두 치우기로 했다. 대신 청원 용지만 손에 들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자는 의견을 냈다. 이후 배너와 테이블 없이 진행해보니 공식적인 느낌이 사라져서 그런지 뭔가 더 어려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시간을 보낸 우리는 잠시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며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해보니까 멘트가 입에서 자꾸 꼬이네요”
“먼저 찾아와서 해주는 분은 잘 없고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외면하시는 분이 많아요”
“여기 장소가 시끄럽고 사람들도 목적지로 서둘러 가는 편이라서 어려운 것 같아요”
“이렇게 번화한 곳 말고 더 작고 조용한 마을 안 쪽으로 들어가서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청원을 진행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애초 판단을 접고 우리는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다니는 익숙한 마트와 상점들, 초등학교가 한눈에 보였다. 우리는 몇 개 그룹으로 나뉘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마을 안쪽을 다니는 분들은 대로변의 사람들과 확실히 달랐다. 길거리는 조용했고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어느 정도 있어 보였다. 특히 초등학교 근처에서 만나는 학부모들과 어르신들은 아이들의 급식 이야기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며 경청해주셨다.
“이런 일이라면 저도 참여해야죠. 안 그래도 요즘 뉴스에 많이 나오더라고요. 어디에서 나오셔서 하는 거예요? 공무원이에요?”
“아니에요, 저도 여기 ㅇㅇ동 주민입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직접 신청해서 마을 조례를 만들 수 있는 제도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 인사를 하고 설명을 하고 청원을 요청하는 일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 날 함께 해준 활동가들 중 비슷한 경험이 있거나 적극적인 분들은 주민들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있었지만 이런 활동을 어려워하는 활동가들은 테이블에 서서 안내하거나 홍보물을 나눠주는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첫날 상황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지만 몇 가지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지치 않고 90일 간 꾸준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자’
나는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을 견딘 곰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