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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Nov 30. 2023

히말라야. 마법사와 바람의 말

어른들을 위한 동화_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 1. 마법사와 바람의 말.


만년설이 고요히 잠든 히말라야의 깊고 깊은 산기슭에, 유달리 겨울이 길고 밤이 일찍 찾아오는 오지마을이 있었다.


제일 가까운 마을마저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꼬박 사나흘 이상을 가야만 하는 히말라야의 고산, 오지 중의 오지인 그곳은 사방이 산인 데다가 가는 길이 험준하고 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외지인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이름 모를 작은 풀 한 포기, 꽃씨 하나 절로 뿌리내리기 힘든 이 척박한 땅은 마른바람이 자주 불고, 비가 매우 드물어 작물을 키우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부지런한 마을 사람들은 그런 대자연에 기대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그 땅에 보리나 밀 등을 심어 농사를 짓거나, 염소나 나귀, 야크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아갔다.


한낮에 따뜻한 해가 잠시라도 비추면,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집 앞마당에 곡식을 널어 말리기도 하고 창가에 빨래를 내놓아 말리거나 연료를 대신할 짐승들의 똥을 지붕 위에 널어놓기도 하며 자연이 주는 모든 축복을 감사히 누렸다. 그마저도 거대한 산 봉우리 너머로 해가 넘어가버리면, 욕심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 비축해 놨던 가축의 마른 똥으로 따뜻하게 불을 피우고, 낡은 난로에 주전자를 올린 후 차를 끓이고 저녁을 지으며 화덕에 모여 앉아 다가올 긴긴밤을 준비한다.


그리고 아침이면 짙은 안갯속, 저 멀리 산 허리에 자리한 불교 사원에서 아침 예불을 알리는 장엄한 소라고둥 소리가 온 마을에 길게 울러 퍼지고, 사원에서 피운 향불의 연기가 뽀얗게 하늘 위로 피어오르면, 색색이 널린 바람의 말, 오색 깃발 룽타가 바람에 펄럭이며 그곳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이 마을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까지도 전설로 내려오는 현자가 오래전 그곳에서 홀로 은둔하며 수행을 했다는 설도 있고, 8세기 경 위대한 스승이 매장했던 신비한 경전 중의 하나가 그 동굴 바위틈에서 발견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마을 외곽에서 푸른 양을 치던 양치기가 호기심에 그 동굴에 들어갔다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동굴을 아주 신성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도 했다.


하늘에 거대한 무지개가 뜬 어느 날, 어디선가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동굴 근처에 작은 거처를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집이 지어지는 것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평범한 노인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소문에 의하면 그 노인은 평생을 홀로 은둔하며 수행하는 요기로, 초자연적이며 신비로운 각종 마술을 비롯해 사람을 죽이거나 저주를 거는 흑마술까지 할 수 있는 무서운 마법사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죽은 사람이나 마귀의 영혼을 불러내는 토착 종교 '본교'의 주술사라고도 했으며, 또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도 했다. 특히 그는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기억을 지우는 과정은 너무나 복잡하고 힘들어 자칫 잘못하면 억겁을 쌓아온, 생애 모든 기억이 지워져 버리거나 심지어 의식 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쩌다 그를 마주치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되도록 거리를 멀리 두고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밤하늘에 무수히 뜬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던 깊은 밤. 이 마을에 사는 '텐진'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아픈 아내를 데리고 은밀히 노인의 작은 움막을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몇 해 전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하나뿐인 귀한 아들을 병마로 갑자기 떠나보낸 뒤,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였다.


지붕에 난 작은 창으로 푸른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창틈으로 바람이 들이치자 버터 램프가 파르르 흔들리며 움막 내부가 붉게 너울거렸다. 노인의 거처는 이렇다 할 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푸른 달빛이 더해 왠지 모르게 신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노인이 입을 열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던 텐진은 아들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으로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아내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아내의 기억에서 아들의 죽음을 제발 지워달라며 노인에게 간청했다.


말이 없던 노인은 텐진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러나 그전에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지. 아들의 죽음을 이 여인의 기억에서 지우면, 그녀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평생 동안 아들을 찾아 헤매게 되는 또 다른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괜찮은가? 뭐, 어쩌면 이별의 고통보다야 언젠가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만. “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텐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두려움에 떨던 텐진은 노인에게 조심스레 되물었다.


 "하하하! 뭘 묻는가? 이 여인의 기억에서 아들의 존재를 통째로 지워버리면 되는 것이지. 참 간단하지 않은가?"


노인의 말을 들은 텐진은 입을 벌린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 아내의 기억에서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좋아.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하루에 한 번 아내에게 참파(보릿가루)와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이지 말게.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밤, 집안 구석구석 보리를 뿌리고 향을 피운 뒤 맑은 물에 아내의 온몸을 깨끗하게 씻기고 다시 나를 찾아와!”




설산의 바람소리와 먼 산에서 울부짖는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들리는 적막한 밤, 드디어 의식이 시작되었다.


이제 신비한 의식을 통하여 그녀가 살아온 억겁의 생애 모든 기억이 하나도 빠짐없이 저장되어 있는 깊은 의식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세포 깊숙이 저장된 집착과 애착의 뿌리를 하나하나 찾아내 제거하면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근처를 떠돌던 악령이 찾아와 훼방을 놓으면 그 영혼은 꼼짝도 없이 모든 기억과 함께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최대한 집중해서 의식을 빨리 끝내야만 한다. 그러나 다행히 텐진의 아들은 그들의 아들로서 이생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니 기억을 지우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노인이 작은북을 치고 요령을 흔들며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의식을 시작하자 마치 죽은 사람처럼 잿빛으로 표정이 없던 여인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고 아들이 탄생하던 순간의 기쁨을 시작으로, 아들과 함께하던 순간순간을 마치 차례대로 다시 겪는 듯 행복한 미소가 가득 차 올랐다.


그리고 의식이 끝을 향해 갈 때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다시 한번 겪는 듯, 갑자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큰 소리로 울부짖다가 실신하였고, 놀란 텐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미동 없이 앉아있던 노인은 눈을 감은 채로 크게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지금 깨우면 이 자의 영혼은 기억과 함께 사라진다! 그럼 다시 돌이킬 수 없어!" 


놀란 텐진은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렇게 밤이 새도록 이어지던 의식이 다 끝나갈 때쯤 저 멀리 언덕 위 불교사원에서 새벽을 알리는 소라고동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정상으로 말끔히 돌아온 텐진의 아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이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가 정상으로 돌아온 기쁨에 가득 찬 텐진은 가까운 친구에게 노인의 이야기를 비밀스레 털어놓았고, 그 이야기는 순식간에 온 마을에 퍼지고 말았다.


그러자 할아버지를 잃은 사람, 할머니를 잃은 사람, 아버지를 잃은 사람, 어머니를 잃은 사람, 남편을 잃은 사람, 아내를 잃은 사람, 자식을 잃은 사람, 형제를 잃은 사람, 손자를 잃은 사람, 친척을 잃은 사람,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 사람,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람 등등 사랑하는 존재와 헤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 둘 노인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텐진의 아내처럼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게 중에는 의식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쉬쉬하며 말을 아꼈기 때문에 그게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마을 사람 모두에게는 살면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인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 사라져 버렸는데 안타깝게도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언젠가 이별하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잊게 된 마을 사람들은,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권태로움과 짜증을 느끼며 서로에게 화를 내고 다투기 일쑤였고, 그렇게 함께하는 '행복‘도 ’ 그리움'이라는 애틋한 감정도, 사랑했던 사람들의 존재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늘에 거대한 무지개가 다시 떠오른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났던 그 노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가 살던 작은 움막 역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을 어른들 말에 의하면 그 신비한 노인은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서 훌쩍 나타났다가 이른 새벽, 바람의 말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을 잊은 사람들만이 사는 그 마을에는, 기억을 잃고 그리움을 모르는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꽤 오랫동안 행복한 웃음소리도 슬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은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별 뒤에 남는 행복한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함께 했던 시간들이 가슴 깊이 존재하는 한 더 이상 그것은 고통만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이 없다면 행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을 사람은 몸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언젠가 만년설이 은빛으로 눈부신 히말라야 고원을 지나다 바람의 말이 펄럭이는 이 마을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면, 그곳의 사람들에게 기억을 지워주는 마법사의 전설에 대해 한번 물어보시길.


그럼 마을 사람 중에 누군가가 따뜻한 버터차 한잔을 내어주며 아름다운 이야기 속으로 당신을 초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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