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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는 큰 거에서 작은 거 순으로 두라고!

그래, 그러려니 해야지

by 냉수 한 그릇

왼쪽 큰 접시를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가며 작은 접시 순으로, 그릇은 물 빠지도록 뒤집어서, 티스푼 및 포크 등 작은 것은 찾기 쉽도록 별도의 수저통에, 자주 쓰는 과일칼이나 빵 칼 등도 따로 보관, 가스레인지는 사용 후 상판에 묻은 이물질이 굳기 전 바로 닦아내고, 사용한 양념 등은 쓰면 바로 원래 위치로, 행주는 씻은 후 잘 마르도록 넓게 펼쳐서 걸어놓기. 설거지하며 자연스레 익숙해진 방식이다. 아내 대신 설거지할 땐 생기진 않던 게, 살림을 도맡아 하며 2년 넘게 설거지하니 나만의 방식이 생겼다.


아내는 설거지하며 나만의 방식을 무너뜨린다. 키 작은 티스푼 등을 일반 수저통에 놓아 쓰려고 하면 한참을 찾아야 하고, 요리할 때 필요한 그릇만 쓰는 나와 달리 사용 가능한 모든 그릇과 접시를 꺼내는 경향이 있으며, 요리 후 양념통을 그대로 두어 싱크대 공간을 차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 이 정도는 설거지와 요리를 도와주니 넘어간다 치자. 접시는 왜 큰 거, 작은 거 구분 없이 놓는다거나 큰 걸 오른쪽에 두냔 말이다. 큰 접시에 작은 접시가 가려 보이지 않으니, 작은 접시가 필요할 때 없는가 보다 착각하게 된다. 주방 들어가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접시 크기와 위치에 불균형이 생기니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보는 순간 원래 위치로 돌려놓는다.


그나마 이건 참을만하다. 날 가장 미치게 만드는 건, 식사 후 접시에 남아있는 음식물을 싱크대 거름망에 버리지 않은 채 그대로 넣는다는 것이다. 그 위로 다른 접시들이 올라가서 접시와 음식물이 한데 뒤섞여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속이 울렁거린다. 설거지에 드는 에너지와 시간도 두 배 이상 더 든다. 어쩌랴. 사람마다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이 있고, 성향과 스타일도 다르니 말이다. 아내에겐 도무지 불편하지 않은 요리나 주방 정리 스타일이 내겐 불편하니, 이것도 그러려니 해야 하나 보다.




난 집에 머무는 걸 좋아한다. 아내는 밖에서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 결혼하면서 어느 정도 상대를 맞추긴 했지만, 각자 가진 성향이 크게 변하진 않는다. 아내는 요리도 잘하고 설거지도 깨끗하게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건 뭐든지 잘하는 아내 특성 때문이지 살림에 관심 있거나 잘해서는 아니다. 아무리 잔소리해도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 걸 보면 안다. 오히려 재정관리 및 분리수거, 그리고 수도, 전기, 보일러 수리 등 집안일은 내가 더 잘한다. 아내는 결단력과 리더십이 있다. 사람을 모으기도, 인솔하기도 하는 능력이 있다. 라디오 DJ를 하면 대박 날 정도로 유머 감각과 말재간이 있다. 때론 과감히 결정하기도 한다. 반면, 난 목회자로 훈련된 리더십이 있을 뿐 사람을 모으고 인솔하는 타고난 능력은 없다. 조용히 집에서 책 읽고 영화 보며 집안일하는 게 좋다. 집안일과 바깥일에 남녀역할이 구분된 게 아니니,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


식사 후 직장 일에 고단한 몸을 풀며 쉬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과일을 깎아주며 설거지하는 내 모습을 보니, 어느덧 주부가 다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림을 해야 할지 지금은 모르겠다. 언젠가는 나와 아내의 일상이 뒤바뀔 때도 올 것이다. 하지만 난 다짐한다. 그때도 접시 정리는 내가 해야겠다고. 접시 크기대로 정렬하지 않은 모습은 도무지 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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