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은 개인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J와 P에 대해서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J는 부지런하고 P는 게으르다’는 인식이다. 특히 내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주로 P인 학생들이 ‘나는 P라서 집중력이 낮기 때문에 공부를 잘 못하고 성적도 낮을 수밖에 없다’고 자조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이는 J와 P에 대해 가치판단적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게으름이라는 삶의 태도를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여기는’ 선호 경향에 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됐다. 아주 쉽게 말하면 남 탓과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공부를 잘 하고 싶은데 마음만큼 잘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비난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삶을 체계적이고 생산적으로 살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아 좌절하는 마음을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자신이 조절하고 연습해서 바꿔나갈 수 있는 영역을 MBTI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거짓되게 위로하면서 거기에 안주하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게으른 것은 그 사람의 태도 문제지 그 사람의 선호 경향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J도 얼마든지 게을러질 수 있고 P도 얼마든지 성실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J가 현실이 통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싫어도 계획을 세우고 움직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P가 반대로 게으르다는 뜻은 아니다. J와 P가 구체적인 생활양식은 서로 다르지만, 각각의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계획성은 총체적인 삶의 지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로 다른 선호경향의 장점이 꼭 어느 한쪽만 항상 필요하고 반대쪽은 필요 없는 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계획성과 실천력은 일정 수준 학습과 사회화의 영역이지 취사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예를 들어 J가 게으르다면 계획을 꼼꼼히 세우더라도 거의 지키지 않는다. 걱정이 많아 다양한 상황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떠올리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또는 계획을 세우는 데만 거의 모든 에너지를 들이고 끝내기도 한다. 앞서 설명했듯 계획이란 J가 현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표현하는 행위기 때문에 계획을 세움으로써 어느 정도 욕구가 분출되면 거기서 만족하고 멈추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 중 계획표를 세세하고 예쁘게 꾸미는 것에는 정성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않아 유명무실해지는 경우가 이와 비슷하다.
반면 P가 성실하더라도 계획 자체는 꼼꼼한 J만큼 구체적이지는 않다. 다만 몇 가지 큰 주제만 정해놓고 바로 실행에 들어간다. 계획 단계에서 사전에 예상해야 했거나 준비해야 할 요소들은 그때그때 현장에서 바로 판단하고 조치하거나 대응책을 마련한다. 그렇기에 실행 과정에서 여러 변수가 생기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게으른 J보다 높은 진행도와 완성도를 보인다. 게다가 P의 높은 유연성과 상황대처능력을 활용하면 같은 상황에서 J였다면 대처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을 일을 훨씬 쉽고 빠르게 해결하기 때문에 돌아가는 비용도 그렇게 높지 않다.
다만 J가 좀 더 성실하고 P가 게으르다는 이미지가 있는 이유는 평소에 보이는 모습, 각각이 에너지를 쓰는 방식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J는 에너지를 나눠서 쓰는 걸 좋아하고 P는 평소에 에너지를 축적했다가 한 번에 투입하는 것 편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면 주변에서 언뜻 보기에는 J는 뭔가 하고 있는 모습이 더 자주 보이고, P는 에너지 축적을 위해 쉬는 모습이 더 자주 보인다. 자연히 J는 항상 일을 하고 있으니 성실하고 P는 항상 쉬고 있으니 게으르다는 일반화로 흐르는 것이다.
하지만 J도 J 나름이기에 항상 뭔가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게 모두 유의미하고 효과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실상 공회전하듯이 시간만 보내며 지지부진하게 일하고 있을 수도 있다. 반대로 P도 몰아서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무조건 결과의 질이 낮은 건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들이는 에너지가 많은 만큼 더욱 효율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부분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좋든 나쁘든 각각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며 생활하기 위해서는 너무 자기 스타일만 고수하지 말고 적절히 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J는 괜히 더 뭘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조급하게 뭐라도 하겠다고 주변을 닦달하거나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맘 편히 푹 쉬며 정말 에너지가 필요한 타이밍까지 충전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다. P는 너무 자기 페이스만 우선하여 주변의 진행도와 일정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고, 때로는 능동적으로 에너지를 내거나 적절히 힘을 빼는 등 주변 속도에 맞춰 완급 조절의 결을 다듬는 것이 좋다. 자신의 선호 경향과는 다른 생활양식이 주로 필요한 업무임에도 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런 조절을 잘 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학습과 사회화가 잘 된 것이다.
이처럼 성실함과 게으름은 J와 P의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태도 문제이며, J와 P는 각각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갖고 있다. J는 정해진 계획이 명확하고 튼튼해 이에 따라 빠르게 일을 추진할 수 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계획이 바뀌거나 전략을 급히 수정해야 하는 경우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능률이 떨어진다. P는 계획이 꼼꼼하지 않고 일의 평균적인 진행 속도가 일정하지 않기에 변동성이 크지만, 계획과 전략을 수정해야 할 때는 유연하게 적응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위기관리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이때 서로가 가진 단점을 비판하고 자신을 절대화하기보다는 각자의 장점을 강화하여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판단형과 인식형은 생활양식에 대한 선호 경향이지만 그 근본에는 자신과 세상의 역학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대한 중요한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둘 중에 어느 쪽도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다. 판단형처럼 행동해야 할 때가 있고 인식형처럼 움직여야 할 때가 있으니 상황에 따른 해답만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으로만 너무 치우치지 않고 적절하게 균형을 갖는 것이다. 생각을 균형 있게 하려는 스스로의 노력도 좋고, 자신이 너무 한 쪽으로만 치우쳐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반대쪽 성향의 사람으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어느 선호 경향이든 자신의 스타일에만 갇혀있지 않고 꾸준히 반대쪽으로도 역량을 확장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유능하고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