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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미낙 Jun 12. 2024

이민 말고 귀촌 (9)

한량

시골살이의 가장 큰 고됨인 제초 얘기를 했으니 오늘은 잠시 여유를 즐겨 봐야겠다.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책을 보면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단 뜻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반대로 얘기하고 싶다. 환경이 열악하다는 건, 그만큼 풍경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래, 열악한 건 사실이다. 편의점을 가려면 집에서 3킬로미터를 나가야 하고, 그나마도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아니다. 배달음식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이곳은.


아침에 머리맡 창문을 열면 밤나무와 호두나무가 춤을 추는 하늘이 보인다. 참새, 산새, 철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가끔은 파랑새가 날아들고, 딱따구리가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추장 머리를 한 후투티가 퍼드덕거릴 때도 있다. 나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몸을 일으켜 자연의 풍경을 들이켠다.


거실 창을 열면 계절이 펼쳐진다. 집에 앉아 계절을 느낀다. 새싹이 나는 것도, 녹음이 짙어지는 것도, 벼가 익고 열매가 익으며 단풍이 물드는 것도 모두 집에서 본다.


번개가 치면 세상이 환해지는 걸 깜깜한 시골 와서 알았다. 달 밝은 밤에 길 떠나는 이유도 시골 와서 알았다.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도 많이 알게 되었다. 별똥별은 밤 산책 때 여러 번 보았다.


올빼미 생활을 하는 나는 밤중에 고라니가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며 킥킥댔고, 이웃의 밭에 자란 옥수수 뜯어먹는 너구리한테 야단을 쳤다. 재미난 일이다. 날 밝을 때면 개똥지빠귀 우는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개똥지빠귀 울 때 이웃 마을 넘어가는 개울을 건넜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뭐 그런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고전소설에 나오는 묘사는 어찌 그리 정확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호두나무 가지 치기를 했더니 바닥에 떨어진 커다란 호두나무 잎사귀 밑에 개구리가 아지트를 꾸렸다. 잎이 시들어 녀석이 그곳을 떠날 때까지 한동안 나는 녀석을 앞집 토토로라 불렀다. 밤 산책을 다닐 때 이웃집 앞길을 가로막았던 두 주먹만 한 두꺼비는 옆집 어르신네 성주신이라 불렀다. 보는 위치에 따라 매번 다른 방향에 떠 있는 듯한 별은 UFO라고 부르며 보일 때마다 손을 흔들어 줬다.



차도에 내려앉은 부엉이인지 올빼미인지를 보고 곧바로 방향을 틀어 달아난 적이 있고, 길 건너던 왕 지렁이를 응원한 적이 있다.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낭랑 18세를 부른 적이 있고, 밤에 자기 집 앞을 지난다고 화내는 동네 고양이한테 투덜댄 적이 있다.


낮에는 땅에서 기어 나왔다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두더지를 보기도 했다. 햇볕 즐기던 시커먼 구렁이와 마주쳐 둘 다 난감하게 백스텝 밟았던 적도 있다. 현관문을 열었다가 덤불에서 번쩍이는 너구리 안광을 보고 줄무늬 후드 쓴 사람으로 착각한 적도 있다.


우리 집에 둥지를 튼 제비 가족이 새끼들 키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제비 부모의 비행연습은 꽤 체계적이다. 한 번 실습하고 나면 꼭 쉬는 시간을 가진다(동물도 교육에 여유가 필요한 걸 아는데, 인간은 왜 모르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새끼 제비들은 여느 젊은이들처럼 좀 날기 시작하면 온갖 허세를 부리며 날 장애물 삼아 곡예비행을 한다.


시골에서 산 후로 이런 수다거리가 끝없이 나온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곳은 내가 몰랐던 세계다. 아름다운 세계다.


도시에서는 시멘트 사이에 핀 자그마한 꽃과 먼지 뒤집어쓴 가로수, 전깃줄로 조각난 하늘로 자연을 접했다. 하수구로 기어드는 쥐와 어두운 자동차 밑으로 숨어드는 고양이, 기괴하게 뒤뚱대는 비둘기가 주위에서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오롯이 마주한다. 어쩐지 안심이 된다. 이제야 나도 눈치 보며 아득바득 버티는 것이 아닌, 본연의 나로 존재하는 것 같아서.


한량 같은 풍경 감상에 모험 같은 밤 산책. 열악하다는 시골에서의 내 삶은 이토록 풍요롭다.


집 옆의 자작나무.. 숲은 아니고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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