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에서 빌런으로 활약해 청룡의 남자가 된 그 진선규가 맞다. 물과 기름처럼 안 섞일 것만 같은 두 단어. 진선규와 필라테스다.
13년간 무명 생활을 보낸 그가 가장 아끼는 명대사에서 필라테스와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첫 단독주연작 영화 카운트에서 나오는 대사다.
복싱이라는 게 다운 됐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시 일어나라고
카운트를 10초씩이나 주거든.
네가 너무 고되고 힘들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어라.
네 숨이 다시 돌아오거든
그때 일어나 싸우면 된다.
내 인생도 아마
다섯이나 여섯쯤 세고 있으려나?
배우 진선규의 담백한 연기와 함께 대사를 곱씹고 있으면, 복싱도 필라테스도 꼭 우리 삶의 축소판 같다.
진선규가 연기한 복싱부 선생의 대사 속 가르침을 필라테스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승부욕이 있는 편에 속해서, 필라테스 초반에 정해진 카운트까지 다 채우지 못하면 진 것처럼 분할 때가 간혹 있었다.
- 이거밖에 안돼? 으이?
- 그것도 못 참아서 포기해? 하..
평소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내 안에 복싱선수가 대뜸 출현한다.
필라테스 수업 중 한 동작을 10번 한다고 하자. 그러면 처음에는 5번만 따라가도 잘하는 거다. 다음 수업에는 6번 하고 포기하려 할 때 "힘들면 그냥 버티기만 하셔도 돼요." 하는 강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 오늘은 6번만 하고 그대로 버티고,
· 다음 주는 7번만 하고 가만히 있고,
· 그러다 보면 이내 10번을 채우게 되는 날이 온다.
너무 고되고 힘들면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건데, 나는 이토록 간단하고도 명쾌한 삶의 진리를 필라테스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5번 하고 포기한다고 해서 그날 하루를 망치거나 끝난 게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필라테스는 여러 동작을 하므로 이번 동작에서 10번 다 채우지 못했다면, 다음 동작에서 또 새로운 기회가 있다. 지난 것은 잊고, 다시 현재에 충실한다.
필라테스는 그 무엇보다도 현재에 발을 디디게 해 준다. 그 이유는 상의하달식 기법이기 때문이다. 두뇌가 의도를 정하고 신체가 지시를 따르는 방식이다. 쏟아지는 강사님의 주문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몸동작으로 출력시킨다. 호흡을 조절하고 신체를 움직이면서 주의를 집중해 정신을 현재 순간에 안착시킨다.
또한, 주위 통제력도 키울 수 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주위집중과 정서, 행동을 잘 조절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의 향상으로 필라테스에 심취할수록 현재의 순간에, 현재의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스파링을 뛸 것처럼 나를 호되게 다그쳤던 초반과 다르게, 정서가 조절된 덕분인지 현재는 나름 상당히 온순해졌다.
- 나는 필라테스 강사다.
- 나는 김연아다.
- 할 수 있다.
마지막 카운트쯤에 다 와서 나의 근육세포들이 이봐 더 이상은 무리야 라고 말할 때, 내가 속으로 되뇌는 말들이다. 필라테스 강사라고 되뇌면 1 카운트라도 더 집중해서 할 수 있다. 강사 체면이 있지 않나. 김연아 선수는 아무 생각 없이 스트레칭을 한다. 나도 똑같이 따라 해 본다.
수업 후반으로 갈수록 힘들어지기 때문에 점점 되뇌는 말의 길이가 짧아진다. 네 글자, 할 수 있다로. 몇십 분 동안 속으로 되뇌면, 실생활에서도 약간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자마자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가 튀어나오면서 진짜 할 수 있다.
마음속에 일렁이던 거대한 물결이 잠잠해지고 고요한 호수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요동쳤던 마음이 잔잔해지면서 깨끗한 거울처럼 주위 풍경도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일그러지거나 왜곡되지 않고.
나는 물론이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려면 일단 기운이 있어야 한다. 에너지가 떨어지면 삶의 질이 떨어진다. 나에게 잘 맞는 운동을 택해 몸에 활력을 되찾아보는 건 어떨까?
꼭 완벽하지 않더라 괜찮다. 현재에 있다면 충분하다. 오늘도 별 다섯 개 받으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