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현우 Dec 19. 2023

멸치 한 마리, 일기장 그리고 마라탕집 맥주

멸치가 며칠 전 혹은 몇 주 전부터 내 침대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다. 밤 열한 시 2분 전, 헝클어진 전기 매트를 깔끔히 펼친 후에야 침대 오른쪽 구석에서 말라비틀어진 멸치 눈깔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누가 내 침대에서 멸치 먹었어?, 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동시에 범인은 바로 세 살 배기 조카 리원이구나, 라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냥 말라비틀어진 멸치 한 마리를 보았을 뿐인데, 사랑스러운 조카의 말과 행동이 바로 상상된다는 게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부엌에서 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멸치 볶음 반찬과 함께 식사를 마친 조카 리원은 더 이상 밥을 식탁에서 먹지 않겠다고 나름의 의사표현을 한 뒤, 내 침대로 와서 입가에 묻은 멸치 한 마리를 일부러 혹은 실수로(일부러는 아니겠다. 세 살 배기 아가이니까) 흘려버린 것이다. 참으로 사랑스럽다. 멸치 한 마리로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라고 글을 계속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2023년 12월 12일 화요일 오전 10시. 까페로 출근하기 위해 머리를 말리던 도중 책상 위 일기장이 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멸치 눈깔을 보고 문득 조카가 생각난 것처럼 나는 여벌의 옷, 속옷, 책 그리고 약간의 돈만 배낭에 챙겨둔 뒤 까페 대신 곧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다. 무책임한 행동일 수는 있어도 일단 나부터 살고 싶었기에 나름의 공지를 띄어둔 채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 것이다. 장소는 미정이라고 생각한 뒤(미정일 수밖에.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기 때문이다) 꽉 찬 5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내 손가락은 상경을 위한 기차표를 확인 중이었고, 두 다리는 기차역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여행을 떠났다.


음악을 사랑하는 일식이 동네 등촌으로 가기 전 그가 추천해 준 염창역 4번 출구 골목에 위치한 마라탕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나름의 첫 번째 계획이었다. 마라탕이 나오기 전 하얼빈 맥주로 먼저 목을 축였다. 큰 한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오전 10시에 책상 위 일기장이 내 눈앞에 아른거리지 않았더라면 이 행복감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라고 말이다. 서울까지 거침없이 달려온 뒤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이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라고 말이다. 마라탕은 그렇게 큰 기쁨을 주진 못했다. 단 맥주의 맛을 더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기에 칭찬해 주기로 했다.


침대 위 멸치 한 마리와 책상 위 일기장 그리고 마라탕집 하얼빈 맥주. 두구두구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지길 바란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보잘것 없이 보이는 하나의 물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게 기쁨 혹은 슬픔 혹은 불안 혹은 즐거움이 될 수 있겠더라. 그 물체는 누군가를 심장을 뛰게 할 수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도 있겠더라. 침대 위 멸치 한 마리는 내게 기쁨이었고, 사랑이었다. 책상 위 일기장은 내게 불안을 떨게 했고, 심장을 뛰게 했다. 마라탕집 맥주는 내게 안도와 환기를 불러일으켰으니.

이전 02화 잔인한 취중진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