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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Nov 28. 2023

잔인한 취중진담

2023년 11월 26일 일요일 오후 10시 20분. 동진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오전에 김장하고 난 뒤 내 체력이 방전됐을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만남을 가져보자는 내용이다.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기도 싫었고. 그의 부름에 응한 뒤 나는 부리나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밤 중에 차갑게 익은 승용차를 예열시키며 존 콜트레인이 부르는「My One And Only Love」로 차갑게 얼은 귀를 녹였다.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에서 조니 하트만의 목소리로 전환되자마자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출발한 지 꽉 찬 20분 채 안 되는 시간에 그렇게 나는 동진과 만났다.


우리는 서로 뭐가 먹고 싶냐며 물었다. 나 말고 동진도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우린 아직 그런 사이다. 우린 아직 그런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집해 보았다. 다행히 동진도 우리가 그런 사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내 선택지에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는 곤이와 명란을 바지락 육수에 넣어 만든 얼큰한 알탕 그리고 간장 소스로 우삼겹을 볶아 만든 불맛 가득한 요리가 있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우린 아직 그런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좋아하는 술을 주문한 뒤 각자 따라 마셨다. 동진은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고, 나는 소주만 홀짝이며 마셨다. 술이 몇 잔 들어가니 동진은 그의 슬픈 이별에 관하여 내게 토로했다. 우리는 아직 그런 사이임에도 이별의 슬픔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도 내 이별의 슬픔에 관하여 대충 알고 있기에.


이 주 전인지, 삼 주 전인지 헷갈릴 정도로 언제 이별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정도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나 보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다고 생각한 나는 이 주 전인지, 삼 주 전에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다. 하나는 확실했다. 분명 꽉 찬 한 달이 안 되는 시간에 그녀와의 이별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기가 막히게 나는 동진과의 술 몇 잔 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시간은 2023년 11월 27일 새벽 4시 44분. 통화 종료 시간은 새벽 4시 47분. 기억나는 건 술 마셨냐는 그녀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 것 밖에 없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기록이 증명해 주었다. 눈을 떠보니 동진네 집이었다. 그녀에게 전화한 사실이 부끄러워 이불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이불도 덮고 자질 않아 그럴 수도 없었다. 동진은 그런 내가 웃긴지 큭큭 거렸다. 우린 그런 사이가 되었다.


동진과 아침 겸 점심 식사를 가까운 까페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우리는 차갑고 질긴 치즈 바게뜨와 과일 향이 애매한 필터커피를 마셨다. 그럼에도 포만감 가득한 표정을 띠고 우리는 안녕을 나눈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는 길 몇 시간 전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규진에게 전했다. 나의 행동이 부끄러운 게 아닌 잔인하다는 그의 메시지를 본 동시에 나는 그녀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로 했다. 아니 지웠다. 그녀와의 만남에서 조금이라도 진지했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터이니. 나는 핸드폰을 차갑게 익어가는 승용차에 두고 내렸다. 그리고 이소라가 노래하는「My One And Only Love」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렇게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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